[뉴스플러스] "반도체=국가 경쟁력 시대"...호시탐탐 韓 기술 노리는 미국·중국

2024-05-30 00:05
해외 기술 유출 절반 이상이 반도체
자국 반도체 공급망 만드는 중국...약한 고리인 메모리 노려
미국은 HBM 등 첨단 기술 눈독
산업스파이 처벌 강화 무산...22대 국회서 통과 기대

[사진=아주경제DB]
한국 반도체 기술을 노리는 중국 등 해외 기업의 산업스파이 활동이 점입가경이다. 이들은 한국의 앞선 반도체 산업과 기술 격차를 좁히기 위해 기업 내부 인력을 꼬드겨 기술을 빼돌릴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산업스파이 처벌을 강화하기 위한 법안이 지난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산업계 반발에 부딪혀 결국 무산된 만큼 22대 국회가 산업계 목소리를 수용한 새로운 형태의 산업스파이 방지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9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 해외 기술 유출 건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해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23건 가운데 반도체 기술은 15건으로 절반을 넘었다. 지난 5년간 반도체 기술 유출로 국내 기업이 입은 피해는 약 23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산업스파이들이 한국 반도체 기술을 노리는 것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반도체 기술의 해외 유출은 2013~2017년 7건에서 2018~2023년 30건으로 4배 이상 늘었다.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한국 기업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이와 관련한 산업스파이 활동도 함께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공격적으로 한국 반도체 기술을 노리는 곳은 중국이다. 중국은 미국 반도체 제재에 맞서기 위해 중국 내에 자체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 화웨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이 시스템 반도체 설계를 맡고 세계 3위 파운드리 업체인 SMIC가 위탁생산하는 구조다. 낸드 플래시는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가 주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 내 반도체 공급망 구조에는 메모리 D램이 비어 있다. 한국 기업이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로 화웨이·푸젠진화 등이 관련 연구개발을 하고 있지만 기술력 격차가 크다. 

따라서 중국 산업스파이는 주로 한국 D램 기술을 노린다. 최근 언론에 알려진 SK하이닉스 HKMG(하이케이메탈게이트) 기술 유출 의혹이 대표적인 사례다. 2022년 SK하이닉스가 세계 최초로 모바일 D램에 HKMG 전공정을 적용해 D램 전력 소모를 크게 줄인 상황에서 중국 법인에 일하던 고객상담실 책임자급 직원이 HKMG 등을 포함한 자료 3000여 장을 인쇄한 뒤 사표를 냈다. 이 직원은 이후 중국 반도체 회사로 이직했다.

지난해 5월에는 삼성전자 상무와 하이닉스 반도체 부사장을 지낸 최모씨가 삼성전자 화성공장 16라인 기초공정데이터와 공정 배치도, 설계 도면 등을 중국 신생 반도체 기업으로 넘기려다 적발된 사례도 있다. 현재 관련 재판이 진행 중이다.

과거 중국 기업들은 한국 반도체 기업 임직원을 대상으로 거액의 보상을 약속하는 형태로 이직을 종용했다. 이들이 가진 기술과 노하우를 빼돌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이 동종업계 이직금지 제도를 도입하고 법원에 관련 신청을 하는 형태로 대응하자 기술을 빼돌리는 방식도 한층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방식이 반도체 공정 관련 장비를 사들이는 형태로 핵심 기술을 빼돌리는 것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장비 자회사인 세메스와 SK하이닉스 협력사에서 이런 방식으로 기술이 유출됐다.

미국 기업도 한국 기업의 첨단 메모리 기술을 원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3월 SK하이닉스에서 HBM(고대역폭 메모리) D램을 연구하던 직원 A씨가 후발 주자인 미국 마이크론 임원으로 이직하려다 제동이 걸렸다. 물리적인 메모리 기술 유출은 없었지만 관련 인력을 채용하려던 사례다.

SK하이닉스에서 HBM 설계 관련 업무를 하던 A씨는 2022년 7월 SK하이닉스를 퇴사하고 마이크론에 임원급으로 이직했다. 퇴직 후 2년간 경쟁업체에 취업하거나 용역·자문·고문 계약 등을 맺지 않는다는 동종업계 이직금지 계약에 반하는 행보다. 법원도 A씨가 SK하이닉스에서 얻은 정보를 들고 마이크론으로 이직하면 회사 경쟁력 훼손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 SK하이닉스가 A씨를 상대로 낸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기술 유출 사례가 매년 수십 건 적발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지적한다. 교묘한 수법으로 인해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기술 유출은 셀 수조차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결국 계속되는 반도체 기술 유출에 대응하기 위해 사법부마저 발 벗고 나섰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1월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을 대폭 높였다. 기술 유출로 인한 개인적 이득이 작다는 이유로 일선 법원에서 산업스파이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이 잇따르자 내린 결정이다.

산업부도 해외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만들어 지난 국회에 냈지만 지나치게 기업 활동을 제약한다는 지적을 받으며 지난 1월 법안 통과가 무산됐다. 해당 법안은 산업기술침해행위(산업스파이) 손해 인정액을 3배에서 5배로, 기술 유출자에 대한 벌금을 15억원 이하에서 65억원 이하로 높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등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인수합병하거나 합작공장을 지으려면 국내외 모든 기업이 정부 승인을 받도록 하는 독소 조항이 함께 담겨 있었다.

이에 산업계에선 정부가 산업스파이 처벌을 강화하면서 글로벌 기준에 맞춰 기업 활동을 제약하지 않는 새 개정안이 22대 국회에서 통과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