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윤 칼럼] 676km 인간띠로 만든 "발트의 길"…한반도에도 '기적'을
2024-05-16 06:00
최근 발트해 3국을 여행했다. 발트 3국은 북·동유럽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일컫는다.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수많은 침략과 지배를 받은 소수민족의 나라다. 중세도시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 1400㎞의 평온한 해안은 모두 그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의 생채기를 그대로 이겨내온 것 같다. 여행이 특별했던 것은 '발트의 길' 때문이었다. ‘발트의 길’은 구소련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의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준 외침이다. 발트해 3국 국민은 1989년 8월 23일 저녁 7시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이르는 약 670㎞를 손에 손을 잡아 거대한 인간 띠를 완성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역사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9년 8월 23일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북·동유럽을 분할·점령하는 비밀의정서도 따로 만들었다. 조약 체결 일주일 후,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 서부를 침공함으로써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다. 소련은 9월 18일 폴란드 동부를 점령하고 발트 3국을 그들 연방에 강제 편입(1940.6)시킨 후 1991년까지 식민지화했다. 그 후 독·소 불가침 조약과 비밀의정서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이는 1988년 10월 소련이 관련 문서를 공개한 데 연유한다.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개선과 상호 신뢰를 증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독소 비밀의정서’가 공개되자 발트 3국 국민은 분노했다. 발트국가들의 민족운동세력(인민전선)들은 1989년 5월 ‘발트 총회’를 열고, 소련 정부를 향해 발트 3국의 불법 점령 사실을 인정하고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6월 15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 ‘시그니처 하우스’에서 ‘발트의 길’이 제안·서명되었다. 그러나 8월 23일 행사까지의 시간은 촉박했다. ‘발트의 길’에 참여할 인원수도 미지수였고, 소련의 무력 개입 여부도 걱정이었다. 행사 개최 8일 전 러시아의 ‘프라우다’는 ‘행사를 금지한다’는 기사를 내보낸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도 대소련 병력 지원을 약속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도 ‘발트 사태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불안감은 행사 당일인 8월 23일까지 계속된다. 그럼에도 1989년 8월 23일 여름의 해가 넘어갈 무렵, 마침내 ‘발트의 길’이 열린다. 탈린의 톰페아 언덕에서 빌뉴스의 게디미나스 탑까지, 라트비아의 울창한 삼림지대를 가로질러 인간 사슬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자유와 독립’을 외쳤다.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비행기는 날개를 흔들었다. 성당의 종소리도 힘차게 울려 퍼졌다. 시위 현장 영상 속 한 소녀의 이야기가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건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사슬이에요, 우리는 절대 서로를 놓지 않을 거예요. 단지 우리는 자유를 원하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요.” 보는 이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발트해 국민의 20% 이상이 거리로 나와 ‘자유’를 외치며, 춤추고 노래를 부른 그날의 기적. 참가 인원수가 모자랄 수 있다는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예상 수의 두 배를 훌쩍 넘은 200만명이 참가했다. 손을 뻗쳐 잡을 정도가 아니었다. 서로 팔짱을 껴도 남을 정도였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었던 당시 라디오 방송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 나라 모두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발트의 길'의 진행 상황을 알리고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세 나라가 모두 생방송 허가를 취득했으나, 소련의 KGB는 돌연 8월 23일 아침 라트비아에서의 생방송 허가를 취소한다. 소련은 라트비아에서만 라디오 생방송을 금지하면 ‘발트의 길’ 행사가 중단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라트비아 '발트의 길'을 진두지휘 했던 다이니스 이반스는 행사가 열리기 전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틀어주도록 했다. 그가 스튜디오에서 자연스럽게 생방송을 하는 느낌이 들도록 했다. 행사를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은 또 다른 문턱을 넘어서야 했다. 모든 소식이 모스크바 크렘린을 통해서만 바깥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해외 기자들의 동원이 쉽지 않았다. ‘인민전선’ 대표들은 개인적 친분을 통해 100명이 넘는 기자들을 취재 장소로 찾아오게 했다. 행사 촬영을 위해 개인 헬기를 동원하고 외국 기자를 탑승시키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발트의 길’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 비록 아날로그 방식이었지만 ‘발트의 길’은 가장 빨리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발트의 길’은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다. 기네스북은 물론,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자유를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 '발트의 길'은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강철 같던 소련 연방을 끝내 무너뜨린 것은 소망을 조직하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자유와 독립을 향한 발트의 염원과 행동을 한반도로 연결·승화시켜야 한다. 인간 띠를 만들어 남북한 사이를 이렇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한다. 빌뉴스 대성당 광장에 스테부클라스(STEBUKLAS)라는 표지석이 있다. 리투아니아어로 ‘기적’이다. 인간 띠의 시작이자 상상조차도 힘들었던 그들의 용기와 행동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기에 글로 새겨둔 것이다. 이 돌판 위에서 멈추지 않고 세 바퀴를 돌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주저없이 돌면서 빌었다. 북녘을 거쳐 유라시아로 갈 수 있는 꿈을 이루게 해달라고.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먼 곳이 되어버린 북녘땅을 여느 외국과 같이 오갈 수만이라도 있게 하는 ‘기적’을 만들어 달라고.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