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그렇지요] 尹대통령의 '자유'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나

2024-05-13 06:00

[이재호 논설고문]


울프가 던진 질문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수석 경제평론가 마틴 울프(Martin Wolf)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곧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결혼’은 실패한 것으로 끝나고 마는가.” 최근 번역돼 나온 저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The Crisis of Democratic Capitalism, 2023년, 고한석 옮김, page2)>에서다. 이 ‘결혼’은 적어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1989년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가 공산 전체주의에 맞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이래 인류의 자유와 번영을 담보할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실패한 결혼’이라니···.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울프는 옥스퍼드 너필드칼리지의 명예 펠로이자 세계경제포럼(WEF) 국제미디어위원회 위원이다. 2000년 금융저널리즘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제국훈장(CBE)을 받았고, 2019년에는 세계 경영·금융전문가에게 주는 제럴드 로브 어워드 평생 공로상도 받았다. 영국 비커스 은행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금융 공황의 시대> <변화와 충격> <세계화는 왜 작동하는가> 등 저서가 있다.

울프는 “지금 와서 보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자본주의 중 어느 쪽도 승리를 거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개발도상국, 신흥국, 옛 공산권 국가뿐만 아니라 서구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실패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정치적 실패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연관성을 거부하는 공산 중국의 부상 또한 '서구의 확신'과 ‘서방에 대한 확신’을 흔들어놓았다.”

울프의 진단과 처방이 논리적으로 완벽히 연결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민주주의가 위기여서 자본주의에도 위기가 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성찰부터 하고 그것이 자본주의로 어떻게 전이됐는지를 설명하는 게 순서다. 그러나 이를 건너뛰고 곧바로 자본주의 위기로 간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 때문에 민주주의에도 위기가 온 건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아니면 양자가 도돌이표처럼 맞물려 돈다는 것인가.
 
주(註)를 포함해 650쪽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과 균형을 이룰 때 자유롭고 번영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일관된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2년 전 취임식에서 ‘자유’라는 말을 무려 35회나 언급했다. 정통 우파 보수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셈이다. 윤 대통령의 ‘자유’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울프를 통해 한번 들여다보자.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균형 회복이 최대 과제 

울프는 서방의 고소득 민주국가들의 장기적 추세, 곧 실질 소득의 정체, 가계부채의 폭발적 증가, 치솟는 실업률, 금융위기, 불평등의 심화, 탈산업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 등으로 인해 기득권층에 대한 신뢰가 훼손됐으며,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정치적 충성도에 변화가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레이건 대통령의 ‘미국에 다시 찾아온 아침’이 트럼프에 이르러 ‘미국의 대학살'로 변해버렸다는 것.
 
따라서 서구 시스템의 건강성(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균형)을 회복하는 게 이 시대 최대의 과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없이 생존할 수 없고, 민주주의는 시장경제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면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취약한 성과가 포퓰리즘과 폭정의 물결 속에 사라지기 전에 보호하는 게 엘리트들의 책임”이라고 했다.
 
요즘 윤 대통령에게 쏟아지는 비판 중 하나는 “국가의 정체성과 국정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거다. 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모르니까 소통이 안 되고, 소통이 안 되니까 국민이 공감하지 못한다는 거다. 역대 정권들처럼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같은 네이밍이라도 했어야 하나. 그러나 이런 비판 자체가 상투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자유롭고 부강하며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중추국가’ 이상의 무슨 비전을 더 보여줘야 하나.
 
울프는 특히 미국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음으로써 체제의 건강성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트럼프는 ‘스트롱맨’과 스트롱맨 정치를 동경하고, 자유언론을 혐오하며, 서방 동맹의 생존에 무관심하며, EU를 극도로 싫어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나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해 이념적 애착이 없으며, 포퓰리스트이자 본능적 권위주의자로 대통령이 되는 데 필요한 인격과 지성이 부족했다”는 거다.
 
이런 지도자가 다시 집권하게 되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적 자본주의 간 ‘균형’은 깨어지고, 그 결과는 자유민주주의의 붕괴로 이어질 거라고 울프는 경고했다. 그는 ‘균형’을 유지하는 요소로 법치와 엘리트의 도덕성을 꼽았다. “법치가 없다면 시장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고··· 엘리트의 능력과 그 타당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 상실은 필연적으로 민주적 정당성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것. 그 결과로 “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분노의 포퓰리즘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울프는 ‘지위불안(status anxiety)'을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적 정치인의 부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틀이라고 했다. 불안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계층구조상 맨 밑바닥이 아닌 밑바닥에서 몇 단계 위쪽에 있는 사람들, 즉 사회적 지위는 낮지만 그래도 방어해야 할 지위가 상당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런 그룹의 사람들은 꼴찌 혐오, 즉 위계질서에서 최하위로 떨어질까 봐 걱정하게 되는데 서구(西歐)에선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이 이에 해당된다는 것.

울프는 특히 포퓰리즘의 폐해와 위험성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다. “높은 불평등, 경제적 불안, 느린 경제성장, 거대한 금융위기 탓에 주요 고소득 사회의 엘리트에 대한 신뢰가 약화됐다. 결국 포퓰리스트의 당선과 포퓰리즘적 대의명분의 승리로 이어졌고 이는 대개 나쁜 정책으로 이어진다. 나쁜 경제가 나쁜 정책을 낳고 다시 나쁜 경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번 총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최악은 포퓰리즘의 악덕과 전제주의 악덕의 결합이다. “포퓰리즘의 악덕은 단기주의, 전문성에 대한 무관심, 장기적인 고려보다 당장 정치적인 것을 우선시한다. 전제주의 악덕은 부패와 자의성이다. 이 두 가지는 경제적 비효율성과 장기적인 실패를 초래한다. 이런 정권은 큰 규모로 도둑질하는 경향이 있다. ··· 이들의 정치는 국민에 대한 사랑이라는 외피 아래 숨겨진 거짓, 억압, 도둑질의 정치로··· 결국 갱스터 국가를 만들어낸다.” 그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망상'이라고 일축했다.

 
민주주의 회복은 '시민성'을 바탕으로  

울프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결혼’이 유지되려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쇄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가장 덜 나쁜 경제체제이듯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도 가장 덜 나쁜 정치체제다. 그럼에도 시장 자본주의에 개혁이 필요하듯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역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시민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쇄신은 시민성을 바탕으로 활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거다. 시민성은 세 가지 측면으로 이뤄진다. 충만한 삶을 누리기 위한 동료 시민들의 능력에 대한 관심, 시민들이 번영할 경제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 열린 토론과 상호 관용의 가치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실패하고 자유는 증발해버린다”는 거다.
 
‘시민성’은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레브치키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2018년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 언급했던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절제(forbearance)를 연상케 한다. 이들은 1930년대 유럽, 1960년대와 1970년대 남미에서 벌어졌던 민주주의의 약화와 부식을 막아준 것은 관용과 절제가 가드레일(guardrail‧난간)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그런 가드레일이 있는가.
 
윤석열 정부가 도덕과 법치를 정치의 한 축으로 세운 것은 옳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한마디에 국민은 감동했다. 그게 출발점이 되기는 했지만 그게 정치의 전부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다수에 의한 지배임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또 아니다. 법과 다수가 충돌하면 엘리트는 자취를 감춘다. 엘리트는 ‘실력 있는 전문가’를 말한다.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국가적으로 손실이다. 여야 모두 너무 경직돼 있다. 더 큰 비효율과 불행이 오기 전에 서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