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불공정 보조금의 시대...한국은 고작 세액공제

2024-04-16 17:31
미국·중국·일본·EU등 직접적 보조금 확대
반도체 생산 설비 유치하고 자국 기업 육성 목표
한국은 간접 지원 정책마저 불투명...여야 초당적 대책 필요

지난 2022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둘러보는 모습. [사진=조 바이든 SNS 갈무리]
"반도체 시장 패권 확보를 위해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 각국이 자국 기업에 불공정한 지원을 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불공정 지원의 수혜자가 될 수는 없어도 피해자가 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한 국내 반도체 석학이 기자에게 한 말이다.

인공지능(AI)을 포함해 21세기 산업 전반의 쌀로 여겨지는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해 주요 국가들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미국·중국을 필두로 일본·유럽연합(EU)까지 가세해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며 자국 내 반도체 생산설비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도체만 얻을 수 있다면 세계무역기구(WTO) 규범 위반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게 이들 국가 입장이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대기업 특혜’라는 낡은 프레임에 갇혀 반도체 보조금 정책에 소극적이다. 전문가들은 여야가 소모적인 정쟁으로 지원 정책을 제때 마련하지 못하면 K-반도체 기업들이 메모리·파운드리(위탁생산) 산업을 주도하는 걸 더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16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설비 유치를 위한 보조금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미국이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7월 미국 내 반도체 설비를 건립하는 기업에 2027년까지 527억 달러를 지원하는 반도체법(칩스법)을 발의했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지난 2018년 파운드리 사업에서 철수했던 인텔이 돌아왔고,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가 미국 투자를 확대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기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규모 보조금은 시스템·D램 반도체 설계에 국한된 미국 반도체 공급망에 생산·패키징·연구개발을 더하기 위함"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반도체 기업이 설계하고 한국·대만·일본 등 아시아 기업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반도체를 양산하는 기존 반도체 공급망 구도를 탈피해, 기업들이 미국 본토 내에서 반도체 설계·생산·패키징 등을 모두 진행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 투자 유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또 있다. 고급 일자리 창출을 포함한 부대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민주당·공화당 경합 지역인 애리조나·오하이오주에 투자를 유치함으로써 오는 11월 예고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와 경쟁에서 우위에 설 방침이다.

중국도 미국·한국·대만 등에 뒤처진 자국 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2015년부터 2025년까지 1조 위안을 투자하고 있다. 이에 미국 정부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장비 수출 통제를 발표하고, 미국 정부로부터 생산지원금을 받은 기업은 중국 생산시설에 투자를 제한하는 가드레일 조항을 만들며 대중국 반도체 견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러한 정책에 중국 내 생산 설비를 갖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규제 대상에 오를까 걱정을 해야만 했다.

일본도 반도체 확보에 국가적 명운을 걸고 있다. TSMC 구마모토 1공장 건설에 4760억엔을 지원하고, 2공장에도 최대 7320억엔 보조금 지급을 계획 중이다. 

이러한 일본 정부 계획에 호응해 도요타·소니·소프트뱅크·미쓰비시은행 등 대기업 8곳이 뭉쳐 '라피더스'라는 파운드리 회사까지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일 라피더스에 기존에 지원한 3300억엔에 이어 5900억엔을 추가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토대로 40㎚급 반도체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일본 반도체 업계는 내년 2㎚ 공정 반도체 생산을 테스트하고 2027년부터 양산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노골적인 삼성전자 견제의 일환이다. EU도 반도체 생산시설에 430억 유로를 지원한다.

반면 한국의 반도체 산업 지원 정책은 세액공제 등 간접 지원에 머무르고 있다. 영업이익을 내기 전까지는 정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구조다. 한국 반도체 기업은 미국·일본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으로 선제적 대규모 투자를 하는 외국 기업과 경쟁에서 근본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올해 말 일몰 예정인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K-칩스법)' 연장이 불투명해지면서 이마저도 지속할 수 있을지 우려가 나온다. K-칩스법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반도체 대기업이 설비투자를 하면 최대 15%(중소기업은 25%)를 세액공제 받을 수 있는 지원 제도다. K-칩스법 일몰 시기를 올해 말에서 2030년으로 6년 연장하는 개정안이 21대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해 22대 국회로 공이 넘어갔다.

WTO 규제를 피하면서 직접적인 지원을 하기 위한 '한국판 인플레이션감축법(IRA)' 관련 논의도 멈췄다. 한국판 IRA는 미국 등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설비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세액공제를 현금으로 직접 지급하고 이를 기업 간 거래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하지만 선거에서 승리한 야당이 세액공제 중심의 지원 정책을 고수하고 있어 22대 국회에서 관련 논의를 지속할 수 있을지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사진=아주경제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