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거목 가셔"…故 조석래 빈소에 정재계 발길

2024-03-31 18:00
효성 그룹 일구며 한국 섬유 산업을 세계 일류로
경제 단체 수장으로 산업계 목소리 내
이재용·정의선·최창원 등 조문 행렬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 [사진=효성]
재계 31위(자산 기준) 그룹을 일군 ‘섬유의 거인’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29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2017년 고령과 건강상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7년 만이다.

31일 재계에 따르면 조 명예회장은 숙환으로 최근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임종은 송광자 여사와 장남 조현준 효성 회장, 삼남 조현상 효성 부회장 등이 지켰다.

조 명예회장은 1935년 경남 함안의 만석꾼 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인 고(故) 조홍제 효성 창업주는 1948년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과 삼성물산을 세워 운영하다 1962년 독립해 효성물산을 세웠다. 

조 명예회장은 경기고를 입학하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히비야고를 거쳐 와세다대 이공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1966년 2월 부친에게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효성은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그룹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던 시기였다. 조홍제 창업주는 화공학을 전공한 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아버지의 부름에 아들은 회사로 달려가 효성그룹 도약의 기틀을 다졌다.

조 명예회장은 ‘원천기술’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연구개발(R&D)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변변한 자원도 없던 시절 경제 대국인 미국, 일본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기술’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효성은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1971년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1992년 스판덱스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고, 2000년 상용화에 성공한 건 이 같은 신념 덕분이다.

한국 섬유산업을 세계 일류로 올려놓은 ‘섬유업계 거인’은 자신에겐 깐깐했지만 밖으로는 국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 단체 수장을 맡으며 산업계 목소리를 대변해 ‘재계의 맏형’으로 불렸다. 조 명예회장이 지갑에 넣고 다닌 명함만 봐도 알 수 있다. 한일경제협회 회장, 전경련 회장,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등 20개에 달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필요성을 공식 제기한 인물도 조 명예회장이다. 2000년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자격으로 필요성을 역설했다. 2012년 한·미 FTA 체결을 성사시킨 주역 중 한 명으로 그가 꼽히는 이유다.

조 명예회장은 화려해 보이는 삶을 꺼렸다. 평소 수행비서를 대동하지 않았다. 그가 중국 출장에서 귀국하는 길에 마중 나온 임원들이 가방을 들어주려 하자 “내 가방은 내가 들 수 있고 당신들이 할 일은 이 가방에 전략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서를 좋아하며 학구적이고 동시에 합리적이기도 하다.

2010년 담낭암 말기 판정을 받아 절제 수술을 받은 조 명예회장은 2014년 초엔 전립선암으로 치료를 받았다. 고인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유족은 지난 30일 오후 1시부터 조문을 받았다.

‘효성 형제의 난’을 촉발한 차남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은 조문 첫날 빈소를 찾아 5분 정도 머무른 뒤 자리를 떴다. 빈소 전광판에 공개된 유족 명단에 조현문 전 부사장 이름은 오르지 않은 것으로 미뤄 일반 조문객 자격으로 찾은 것으로 보인다.

빈소에는 윤석열 대통령 명의 조화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양쪽에 나란히 놓였다. 영정 사진 앞에는 고인이 1987년 받은 금탑산업훈장도 함께 놓였다.

조문 첫날부터 재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재계 오너 일가 중에서는 가장 먼저 고인의 동생인 조양래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그룹) 명예회장이 차남인 조현범 한국앤컴퍼니 회장과 함께 침통한 표정으로 빈소를 찾아 1시간가량 머물렀다.

이날 4대 그룹 중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모친인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함께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았다. 이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조문하며 “(조 명예회장은) 아주 좋은 분이셨다”며 “좋은 곳으로 잘 가시기를 바란다고 했다”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촌동생으로 ‘SK 2인자’인 최창원 SK수펙스협의회 의장도 조문을 위해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재용 회장 동생 이서현 삼성물산 전략기획담당 사장도 남편 김재열 삼성글로벌리서치 사장과 함께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한일경제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은 “재계의 큰 거목이 가셔서 아주 큰 손실”이라며 “특히 섬유 산업에서는 큰 선구자였는데 가셔서 애석하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정계에서는 조문 첫날에는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오세훈 서울시장,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 등이 조문했다. 조문 이튿날엔 조 명예회장과 사돈지간인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빈소를 다녀갔다.

조 명예회장 장례는 효성그룹장으로 다음 달 2일까지 5일장으로 치러진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명예장례위원장을, 이상운 효성 부회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발인은 4월 2일 오전 7시, 영결식은 오전 8시에 열릴 예정이다.
 
지난 30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 빈소. [사진=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