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한국형 오컬트의 기준…장재현 감독 영화 '파묘'

2024-02-22 17:23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파묘' 스틸컷 [사진=쇼박스]
국내 오컬트 장르의 입지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서사보다 호러적인 요소가 강조되고 가볍게 소비되어 오컬트 장르 팬들마저도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장재현 감독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지난 2015년 개봉한 영화 '검은 사제들'은 국내 영화계 파문을 일으켰다. 공포영화로만 정의 내려졌던 '오컬트' 장르의 새로운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오컬트 장르의 클래식함을 따르면서도 악마, 구마 등 한국인들이 멀게 느껴졌던 요소를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다.

특히 오컬트 장르와 종교, 무속신앙의 결합은 신선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고 동시에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해냈다. 장 감독은 오컬트 장르 마니아들과 대중을 동시에 만족 시켰고 장르 영화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후속작으로 '사바하'를 내놓았고 이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와 세계관을 다져감과 동시에 '한국적인' 오컬트 장르의 기준을 세웠다. 장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파묘'는 그야말로 장르 굳히기. '한국적인 오컬트'의 기준점이 곧 자신이라는 선언처럼 보인다.

무당 '화림'(김고은 분)과 '봉길'(이도현 분)은 미국 LA에 거주 중인 의뢰인으로부터 거액의 의뢰를 받는다. 기이한 병이 대물림 되는 집안의 장손을 만난 '화림'은 조상의 묫자리가 화근임을 알아채고 이장을 권한다. 어딘지 수상한 기운이 가득한 의뢰인을 뒤로하고 '화림'과 '봉길'은 최고의 풍수사 '상덕'(최민식 분)과 장의사 '영근'(유해진 분)을 섭외한다. 이장을 위해 찾은 묫자리는 기이한 기운으로 가득하고 '상덕'은 단박에 "사람이 묻힐 수 없는 악지"라는 걸 알아챈다. 이에 '상덕'은 제안을 거절하지만 '화림'은 계속해서 그를 설득한다. 결국 대살굿을 펼치며 파묘를 시작한 이들은 나와서는 안 될 '그것'과 마주하고 만다.
영화 '파묘' 스틸컷 [사진=쇼박스]

영화 '파묘'는 장 감독의 전작들보다 더욱 한국적이고 민속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치열한 취재와 탄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인물들과 상황들을 꾸려나갔고 그의 집착은 영화 곳곳의 디테일로 남았다. 배움의 깊이로 느껴지는 디테일과 신뢰감이 만족스럽다.

장 감독의 장기인 캐릭터 구축과 배치도 흥미롭다. 밝고 쾌활한 성격의 인물들을 가장 음한 험지로 밀어 넣고 이를 해결하도록 만드는 방식은 이번 작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가장 어두운 일을 도맡는 '사제'부터 그릇된 신념에 사로잡힌 '사이비 종교 신도' 등 마니아 관객들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장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캐릭터들을 매력적이고 멋스럽게 디자인했다. 무속인의 이미지를 비틀고 새롭게 조합한 '화림'과 '봉길', 현실에 발붙인 전문가 '상덕' '영근'의 조합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조화롭다. 이들이 주는 균형감은 매력적이고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끌어낸다. 영화 군데군데서 발견하는 인물들 간 관계성이나 설정 그리고 이미지적 디테일은 '덕후'의 심장을 관통할 만하다.

'기이한 대물림'을 시작으로 '파묘'로 이어지는 서사는 오컬트와 미스터리를 넘어 민속적인 이야기로 확장된다. 아쉬운 점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거대한 서사와 디테일들을 인물들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설명되곤 한다. 영화의 무드나 시각적 강렬함을 넘어 서사까지 쏟아져 내리는 모양새다. 이 분야 전문가인 장 감독이 쏟아내는 정보나 숨은 정보 그리고 디테일들을 따라가기가 급급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각 장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고 서사를 따르다 보니 '시리즈물이었다면 조금 더 숨 돌릴 틈이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영화 '파묘' 스틸컷 [사진=쇼박스]

그렇다고 해서 '파묘'가 영화적 매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훼손되었다는 말도 아니다. 장 감독이 만든 세계는 공고하고 전작들과 함께 궤를 이룬다. '음양오행'을 주제로 캐릭터에 상징성을 녹이고 메시지로 확장하며 비주얼로 귀결하는 방식은 전작들만큼 견고하다. 대중에게는 친화적이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마니아들에게는 곱씹고 되새기는 방식으로 즐길만한 작품이다.

'파묘'의 세계를 구현하고 확장하는 건 배우들의 공도 컸다. 스스로도 "배우 복이 있다"는 장 감독답게 '파묘'는 최민식을 중심으로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등 굵직한 배우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어간다. 각각 특정 신들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한다. 최민식은 극 전체를 지배하며 무게감을 싣고, 유해진은 극과 캐릭터가 현실에 발붙일 수 있게끔 만든다. 그리고 선배들의 극찬대로 환상적인 대살굿 장면을 소화해 낸 김고은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번 작품으로 스크린 데뷔한 이도현도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전작들의 인상을 단숨에 지우고 더 큰 가능성을 열어둔다. 극장을 나선 뒤에도 배우들의 활약과 호흡이 오래 회자할 만한 작품이다. 22일 개봉. 러닝타임은 134분 관람등급은 15세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