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제 광명론' 풍자한 '현대판 루쉰'?

2024-02-12 16:16
中누리꾼 트위터에 올린 소설…검열 삭제
룬투·자오영감·아큐 등 루쉰 소설 속 인물 등장
배달로 떼돈 번 룬투···"장삼 벗어던져라"
'호루라기 아큐'···나라 경제 발전의 중책

중국 저장성 샤오싱의 '루쉰 옛집' 입구에는 담배를 태우는 루쉰의 흉상이 새겨진 대형 화강암 벽이 세워져 있다. [사진=배인선 기자]

"루전 전체가 낙관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整個魯鎮都洋溢著樂觀嚮上的氛圍)."

최근 '펑만만(風慢慢)'이라는 필명의 중국 한 누리꾼이 SNS 엑스(구 트위터)에 올린 소설 제목이다. 루전(魯鎮)은 중국 근현대 작가 루쉰(魯迅)의 소설 '쿵이지'의 배경이 되는 마을인데, 중국 지도부가 제창하는 '경제 광명론(光明論)'을 신랄하게 풍자한 소설이라며 중국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마치 루쉰이 소설 쿵이지·아큐정전 등을 통해 과거 중국 봉건제도의 폐악을 풍자와 역설로 고발했듯 말이다. 중국 당국의 검열로 현재 이 소설은 중국 온라인에선 자취를 감췄다. 
 
주가 대폭락에도···'경제 광명론' 외친 관영매체
소설 제목은 앞서 2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3면에 실린 기사 '온 나라가 낙관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다(整個國家都洋溢著樂觀嚮上的氛圍)'에서 따왔다. 독일 공산당의 국제관계 서기를 인터뷰한 기사인데, 중국식 현대화가 중국 경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런데 하필 이날은 중국 증시가 한바탕 폭락해 우량주 중심의 벤치마크 지수인 CSI300지수는 5년래 최저치를 기록한 날이었다. 경기 둔화, 주가 폭락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국 현실과 괴리된 기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소설은 루전 마을 주점에서 심부름꾼을 하는 소년 '나'를 중심으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게 소설 '쿵이지'와 비슷하다. 연말을 맞이해 룬투, 수차이, 자오 영감, 아큐 등 루쉰의 소설 속 인물들이 주점에 모여들어 나누는 대화 곳곳에서는 경제 광명론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배달로 떼돈 번 룬투···"장삼을 벗어던져라"
룬투는 본래 루쉰의 소설 '고향'에서 '나'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동갑내기 친구로, 나이가 들면서 현실의 괴로움 속 결국엔 정신이 마비된 삶을 사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룬투는 돈 벌러 상하이에 갔다가 배달기사로 취직해 3년간 100만 위안(약 1억8000만원)을 벌어 빚을 청산하고 새집도 장만할 것이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다. 최근 경기 침체 속 청년 실업난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가운데, 중국 관영 매체들이 배달·육체노동·농사 등을 통해 쉴틈 없이 일해서 큰돈을 버는 청년을 집중 조명했는데, 룬투는 바로 그런 청년의 한 예인 셈이다. 

룬투의 성공 스토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흥분하면서 앞다퉈 배달원으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아름다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며 희망에 찬 구호를 외친다. 

룬투는 심지어 한때 도련님 소리를 듣다가 집이 망해서 주점 사환으로 전락한 '나'에게 "시대가 변했다"며 "(쿵이지처럼) 장삼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충고를 한다. 

소설 쿵이지 주인공은 생계를 위해 도둑질까지 하면서도 선비 신분을 상징하는 낡은 장삼을 끝내 벗지 않았는데, 룬투의 충고는 고학력 졸업장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저임금 일자리는 거들떠보지 않는 청년들에게 '장삼에 얽매이지 말라'고 조언한 중국 관영매체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관영매체의 이 조언은 “어렸을 적에는 '장삼을 입어야 한다(대학을 가야 한다)'고 가르치더니, 성년이 되자 장삼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냐며 많은 청년들의 비판을 받았다. 
 
'호루라기 아큐'···나라 경제발전의 중책
소설 '아큐정전'에서 지주 출신의 부자로 나오는 자오 영감은 최근 주가 폭락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은 '개미 투자자'로 묘사된다. 마을 사람들의 걱정과 우려 속에서도 자오 영감은 "주가 하락은 미래에 더 많은 에너지를 축적하기 위함"이라며 "주식 투자는 국운에 맡기는 것", "우리 나라 경제는 밝다. 국가가 돈을 투입해 시장을 살리니 주식시장 곳곳에 황금이 가득하다"며 오히려 희망에 가득 차 있다. 주가 폭락에도 비관적 보도를 자제하고 중국 증시 예찬론을 외치는 중국 관영 매체 보도를 연상케 한다. 

심지어 자오 영감은 아큐를 찬양한다. 소설 아큐정전에서 날품팔이로 먹고살며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주인공 아큐는 마을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자오 영감은 아큐가 현재 중앙 관료에 의해 '호루라기를 부는 일'을 맡고 있다며, '나라 경제 발전이 모두 아큐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소설은 마지막에 "호루라기를 불어서 어떻게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 혼란스럽다. 세상에 낙관적인 분위기가 없더라도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이 많아지면 낙관적 분위기가 넘쳐 나는 것인가 보다"라는 '나'의 독백으로 끝을 맺는다. 루쉰 소설 '고향'의 "세상에는 본래 길이 없어도, 그 길을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곳이 곧 길이 된다"는 구절을 차용해 현실을 비꼰 것이다. 

'호루라기를 불다'는 사실상 중국 경제 '광명론(光明論)'을 뜻한다. 경제 광명론은 중국 경제를 둘러싼 긍정적인 보도로 여론전을 강화하라는 뜻으로, 중국 경제 성장 둔화에 대내외에서 제기되는 비관론에 맞서 중국 지도부가 내놓은 해답이다. 

지난해 말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재한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경제 선전과 여론 지도를 강화하고, 중국 경제 ‘광명론’을 노래하라는 주문을 내렸다.

실제로 올 들어 중국 현지 매체들이 자국 경제 성장 둔화에도 '장밋빛' 전망만 내놓고 있으며, 중국 경제 문제점을 비판한 글을 올린 웨이보 등 SNS 계정이 검열과 통제로 삭제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