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국가 손해배상 책임' 처음 인정

2024-02-06 15:33
1심 뒤집고 원고 승소 판결…"300만∼500만원 지급하라"
"화학물질 심사 미흡한데도 환경부 '유독물 아니다' 공표"

지난달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가족, 환경시민단체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2심 판결 후 가해 기업들이 대법원에 상고했다. 잘못을 뉘우치고 피해자에 대해 배상·보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사진=연합뉴스]
유해 가습기 살균제로 질환을 겪은 피해자나 유족에 대해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첫 법원 판단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9부(성지용·백숙종·유동균 부장판사)는 6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등 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다만 원고 중 2명이 위자료 성격인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상 구제급여조정금을 이미 지급받은 점을 고려해 3명에게만 300만∼500만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재판부는 "화학물질 유해성 심사·공표 단계에서 공무원 과실이 있는지를 면밀히 본 결과 재량권 행사가 현저하게 합리성을 잃어 위법하다"며 "결과적으로 국가 배상 청구권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2016년 1심은 제조업체에 대해 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국가에 대한 청구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각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 화학물질이 심사된 용도 외로 사용되거나 최종 제품에 다량 첨가되는 경우에 관한 심사는 이뤄지지 않았다"며 "그런데도 환경부 장관 등은 이 사건 화학물질이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않는 물질'이라고 일반화해 공표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에 쓰인 화학물질의 용도와 사용 방법에 대해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공표할 경우 국민 건강 위협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도 봤다. 

서울고법 관계자는 "국가 배상 책임의 발생 여부를 판단하면서 공무원의 권한 행사가 국민의 건강·생명·신체에 미치는 영향, 헌법상 국가의 국민 보건에 관한 보호 의무를 비롯한 국가의 책무 등도 고려해야 함을 강조했다"고 판결 의의를 설명했다. 

앞서 영·유아들이 원인 불명인 폐질환을 앓는 사례가 많아지자 보건 당국이 조사를 진행했고 1994년부터 시중에 유통된 가습기 살균제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에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뒤 원인 모를 폐 손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받거나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은 2014년 국가와 제조업체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지원 종합 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31일 기준 지원 대상 피해자는 5691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사망자는 1262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