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4) 한 패가 되어 못된 짓을 함 - 낭패위간(狼狽為奸)

2023-12-12 06:00

[유재혁 에세이스트]



1979년 궁정동 안가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철옹성 같던 유신체제가 와해되었다. 온나라가 들뜬 마음으로 '서울의 봄', 즉 민주화가 된 세상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반란으로 국민의 열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 군사반란은 '12•12 사태'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2•12 사태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장안의 화제다. <서울의 봄 >은 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 50분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아홉 시간 동안 벌어진 군사반란을 감독의 상상력을 보태 영화적으로 재해석한 팩션(팩트+픽션) 영화다. 군사반란의 주역 전두광(전두환) 배역에 완전 몰입한 배우 황정민의 광기 어린 '메소드 연기'가 관객의 눈과 귀를 빼앗고 심박수를 치솟게 한다. 개봉 18일째인 지난 주말 관객수 6백만을 돌파했고 천만 고지 돌파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팩션 영화의 이면에는 사실과 허구를 섞은 영화의 스토리를 100% 사실로 오인하는 위험성이 늘 어른거린다. 혹여 정치적 의도라도 들어가면 정쟁의 도구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12•12 사태의 전말을 잘 모르는 2030 세대가 흥행을 주도하는 <서울의 봄> 역시 그같은 위험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비록 영화적 상상력을 더하고 선악구도를 도식화했을지언정 12•12 군사반란 성공의 일등공신이 군내 사조직 '하나회'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나회가 주도한 군사반란이 성공함으로써 세상은 뒤집혔다. 민주화의 열망은 꺾이고 춘래불사춘,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 불의한 방법으로 세상을 뒤집은 그들은 권력에 굶주린 이리떼였다.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기대에 어긋나 매우 딱하게 된 상황을 일러 '낭패를 보았다'고 한다. 낭패를 구성하는 두 글자 '낭狼'과 '패狽'는 이리와 유사한 전설상의 동물이다. 생김새와 흉폭한 성정이 서로 아주 닮았다. 다른 점이라면, 낭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반면 패는 그와 정반대라는 거다. 낭은 패 없이 설 수 없고, 패는 낭 없이 갈 수 없다. 이 둘이 서로 떨어져 서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상황이 바로 낭패인 것이다.

하루는 낭과 패가 민가에 가서 양을 훔치려는데 울타리가 너무 높았다. 아무리 해도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자 발만 동동 구르던 낭에게 순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패야, 너랑 나랑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여 힘을 합치자. 내가 네 목덜미에 올라탈 테니 너는 긴 뒷다리로 일어서라. 목마를 타고 키가 높아지면 내가 긴 앞다리를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어 양을 낚아챌게."

듣고보니 너무 좋은 아이디어인지라 패는 군말없이 낭의 말에 따랐고, 그렇게 해서 두 놈들은 토실토실 살이 오른 어린 양 한마리를 훔쳐 마음껏 배를 채웠다. 그로부터 낭과 패가 항상 한패가 되어 가축을 훔쳐먹는 통에 사람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 고사에서 '낭패위간狼狽為奸'이란 성어가 나왔다. 직역하면 '낭과 패가 간교한 꾀를 부리다'' 정도가 되겠고, '서로 결탁하여 함께 나쁜 짓을 한다', '한패가 되어 못된 짓을 일삼다' 등의 비유로 활용된다. 출전은 《박물전휘博物典彙》. '박물' 또는 '자연사'에 관련된 다양한 사항을 종합하여 정리한 고전적인 백과사전으로, 중국 전통 지식과 문화의 보고로 여겨진다. 

패거리를 이루어 군사반란에 앞장서서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한 하나회의 행태는 낭패위간의 전형이다. 권력에 굶주린 이리떼의 발호는 국가와 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5공 출범 후 군과 정부 요직을 독점한 하나회는 군사반란 14년 뒤 문민정부를 연 YS에 의해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

비단 하나회 뿐이랴. 무리를 지어 못된 짓을 하는 이리떼들은 늘 우리 주변에 있다. 대통령 친구를 위해서 선거에 개입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불법을 공모한 공직자들이 최근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되었다. 배에서 실족하여 표류하던 국민을 방치하다가 피살되자 사실을 은폐•왜곡하고 자진 월북으로 몰아간 관계기관의 불의가 감사원의 감사 결과 확인됐다. 

최근 대통령 부인을 겨냥한 듯한 '설치는 암컷' 발언 등 정치인들의 막말이 이어지고 있다. 말도 함부로 하면 폭력이 된다. 천박한 언어폭력의 일상화는 정치의 퇴행을 가져온다. 군인의 무기가 총칼이라면 정치인의 무기는 입이다. 총구의 방향을 거꾸로 돌려 역사를 퇴행시킨 하나회나 입을 험하게 놀려 정치를 퇴행시키는 정치인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차기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막말을 무기 삼아 입신양명을 노리고 숨기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한 정치판의 이리떼들을 어찌 솎아내야 할지. 우리 모두의 숙제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