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이의 브랜드이야기] '우아함의 대명사' 크리스찬 디올, 파리를 세계적인 패션 도시로 만들다

2023-11-21 12:00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 [사진=디올]
프랑스인들의 자존심과 같은 상징적인 명품 브랜드가 있다. 프랑스를 단숨에 세계적인 패션 중심지로 올려놓은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이다.
 
디올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브랜드로 손꼽힌다. ‘우아함의 대명사’로 불린다. 샤넬이 모던하면서도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스타일이라면 디올은 화려하면서도 여성성을 강조한 디자인이 주를 이룬다. 
 
우아한 여성복으로 잘 알려진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은 1946년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파리 몽테뉴 거리 30번지에 부티크를 열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 샤넬 밀어낸 디올…세상에 없던 새로운 스타일 ‘뉴 룩’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 직후는 말 그대로 디올의 전성시대였다. 1947년 디올이 선보인 첫 번째 컬렉션은 샤넬의 실용적이고 직선적인 실루엣과는 대비되는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둥근 어깨와 높은 가슴선, 가늘게 조인 허리, 무릎 아래로 넓게 펼쳐지는 치마가 디올의 대표적인 스타일이다.
 
바 슈트 등 디올의 뉴 룩 스타일의 의상들 [사진=디올]
당시 대표 디자인인 ‘바 슈트(Bar suit)’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여성복에서 사라졌던 풍성한 옷감을 사용하며 유연한 곡선을 살린 디자인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하얀 실크 재킷에 검정 울 크레이프 주름치마, 허리를 조이는 벨트 등을 활용해 ‘아워 글라스 실루엣’(모래시계 실루엣)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이를 본 미국의 패션 잡지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 카멜 스노우는 “이는 참 새로운 룩이다(It’s such a new look)”라고 표현했다. 여기에서 유래해 ‘뉴 룩(New Look)’은 이러한 실루엣의 옷을 일컫는 용어가 됐다.
 
뉴 룩은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프랑스 파리를 세계적인 패션의 중심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후 디올은 알파벳으로 실루엣을 묘사한 H라인·A라인·Y라인과 튤립라인·애로라인 등을 선보이며 사랑받았다.
 
디올 뉴 룩 스타일 [사진=디올 홈페이지]
 
◆ 프랑스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디올’
40세가 넘은 나이에 시작한 크리스찬 디올은 “나는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는 자신감으로 이듬해 첫 오트 쿠튀르 패션쇼를 열었다. 그는 첫 패션쇼에서 풍성하고 화려한 스타일의 의상을 선보였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49년 우아한 드레스에 어울리는 향수 ‘미스 디올’과 기성복 라인인 프레타 포르테(Prêt-À-Porter)는 유럽을 넘어 미국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크리스찬 디올은 디자인뿐만 아니라 사업가로서 자질도 출중했다. 그는 1947년 ‘우아한 드레스에 어울리는 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퍼퓸 크리스찬 디올’을 설립했다. 그리고 디올 최초의 향수 ‘미스 디올(Miss Dior)’을 세상에 처음 공개했다. 
 
미스 디올 향수 [사진=디올]
자신의 옷과 어울리는 디올 향수의 ‘미스 디올’은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미스 디올은 이후 블루밍 부케, 자도르 등 유명 향수의 시초가 된다.
 
크리스찬 디올은 거침없이 성장했다. 1950년 이미 전 세계에 17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기업으로 우뚝 섰다. 브랜드를 설립한 지 불과 4년 만이다. 1951년에는 당시 프랑스 전체 수출의 50%를 창출해 냈고, 프랑스 대미 수출액의 75%를 차지했다.

1953년에는 립스틱 ‘루즈 디올(Rouge Dior)’을 선보이며 화장품 시장에도 발을 들였다.
 
크리스찬 디올은 1956년 프랑스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레지옹 도뇌르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으로 대통령이 직접 정치나 경제·문화·종교·예술 등 각 분야에서 공로가 인정되는 사람에게 수여한다. 1957년에는 ‘타임(Time)’ 잡지 표지에 얼굴이 실리기도 했다.
 
◆ 디자이너 양성소 ‘디올’ LVMH에 인수
1957년 디올이 52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뒤에도 브랜드 명맥은 유지됐다. 당시 디올의 제자이자 패션계에 한 획을 그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21살의 젊은 나이로 디올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에 올랐다.
 
생 로랑은 1958년 첫 번째 컬렉션에서 선보인 사다리꼴 모양의 ‘트라페즈 라인’은 디자이너 디올의 사망으로 존폐 위기에 놓였던 브랜드를 되살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생 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디올의 차기 디자이너로서 손색이 없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오래 가지 못했다. 생 로랑은 1960년 거리의 청년들에게 영감을 받아 ‘비트 룩’을 선보였다. 당시 디올의 주요 고객층이었던 귀부인들과 거리가 먼 파격적인 컬렉션은 디올의 기존 고객들에게 외면받았다. 결국 생 로랑은 3년 만에 디올에서 쫓겨나다시피 나가게 된다.
 
다음 수석 디자이너가 된 마르크 보앙(Marc Bohan)은 가장 오랜 기간 디올을 이끈 디자이너다. 그는 1967년 디올을 대표하는 ‘오블리크 패턴’을 만들었고, 1974년에는 ‘CD 다이아몬드 패턴’을 선보였다. 그는 디올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기성복 라인을 론칭하기도 했다.
 
레이디 디올백(왼쪽)과 오블리크 패턴이 적용된 디올 새들백 [사진=디올]
1980년대는 디올이 경영 위기를 맞았다. 프랑스 정부까지 개입해 재정 지원을 했지만, 회생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결국 디올의 모회사는 세계적인 명품그룹 LVMH(루이 비통 모엣 헤네시)그룹에 넘어가게 됐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그룹 회장은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로 존 찰스 갈리아노(John Charles Galliano)를 임명한다. 그는 클래식한 디올 이미지를 화려하고 젊은 이미지로 바꿔놓았다. 다이애나 비가 즐겨 들던 ‘레이디 디올 백’은 전 세계에 10만개 이상 판매되면 ‘잇백(It Bag)’ 열풍의 시초가 됐다.
 
‘사치스럽다’는 이미지와 ‘여성을 억압하는 코르셋을 부활시켰다’는 이유로 수많은 논란과 화제의 중심이 됐지만, 가방부터 구두, 향수, 액세서리 등 각종 분야에서 디올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이미지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