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경제안보시대…한일경제협력의 새 지평을 열다
2023-11-15 05:00
한·일 관계는 역사와 감정이 정치를 흔들고, 결국 경제를 볼모로 잡는 일의 반복이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이런 반복을 종언시키고자 한 역사적 결단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빛바랜 이 선언에 담긴 상호존중과 상호인정, 그리고 과거를 직시하면서도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마른 들에서 새싹이 나오듯 소생하고 있다.
작금의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셔틀외교는 ‘현재가 과거와 싸우도록 내버려 두면 잃는 것은 미래’라는 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의 말을 상기시킨다. ‘윤석열-기시다 미래선언’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일 정상의 셔틀외교는 2011년 일본 교토에서 이뤄진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총리와의 회담이 마지막이 됐다. ‘윤석열-기시다’ 셔틀외교는 한·일관계 ‘잃어버린 10년’의 복원이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한·일 관계가 잘 안 풀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현재의 한국과 일본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 두 나라는 무역 파트너이고, 교육, 화학, 기술 영역에서 교류하고 있으며, 상대방의 대중문화도 받아들이고 있다. 양국은 지난 정부와 다르게 동맹 관계를 중시하고, 중국의 경제적·군사적 부상에 대해 같이 대응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미국 시사지 포린어페어즈는 “서울과 도쿄가 화해가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다면, 그 길은 존재하며, 역사 문제가 장애물이 될 수 없다”고 논평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특히 경제관계도 수복(修復)을 넘어 선순환의 단계로 넓혀나가야 한다는 당위와 기대가 부풀고 있다. 한국 경제에 있어서 일본과의 관계 회복은 필수불가결하다. 지난 10년간을 돌이켜보면 예컨대 한국 수출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2020년 26%에 달했다. 군사동맹국인 미국이 14%,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이 5%에 불과하다. 1990년에는 반대로 미국 30%, 일본 19%, 중국은 겨우 2%였다. 여기서 아픈 경험은 정부의 누적된 안보와 경제의 뒤틀림이 그대로 드러난 2016년 '사드 문제'였다. 미국이 한국에 미사일을 배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 슈퍼마켓이 중국에서 철수한 사건이다. 이와 관련 일본경제신문은 “아시아에서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시장을 가진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국으로선 아쉬운 '잃어버린 10년'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한국과 일본의 경제 관계가 빠르게 정상화되는 추세가 더욱 주목된다. 지난 6월, 8년 만에 통화교환(스와프) 협정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1997년 외환위기 교훈을 바탕으로 2001년 체결됐다. 하지만 2012년 이명박 대통령(당시)의 독도 상륙 등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2015년 기한 만료와 함께 종료됐다.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세계 9위인 약 4200억 달러(약 600조원)에 달한다. 통화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적다.
일본 미디어들은 “이번 협정 재개 합의는 환율 안정 효과보다 한·일 경제 관계 회복을 상징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분석했다. 올해 3월 정상회담 이후 경제 관계가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음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사례다. 일본은 7월에 한국을 수출 절차가 우대되는 '그룹 A(백색국가)'에 재지정했다. 이에 앞서 지난 3월에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해 강화했던 수출 규제를 완화했다. 한국도 이미 일본의 조치를 둘러싼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하고 일본을 우대국으로 재지정했다. 이로써 한·일 경제관계는 2019년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강화조치가 취해지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한국은 세계 유수의 반도체 업체를 보유하고 있고, 일본은 소재와 제조 장비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경제안보 측면에서도 중요 물자인 반도체 공급망 강화는 공동의 이익이다. 한·일 경제계는 오랜 기간 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역사 교과서나 위안부 문제로 외교적 갈등이 생겨도 경제관계가 냉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징용공 문제로 사태가 악화됐다. 당시 아베 신조 정권은 수출 규제를 강화했다. 한국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됐고, 한국 기업들은 대상에서 제외된 소재 등을 일본 이외의 조달처를 찾았다. 반대로 한국 사업을 축소하거나 철수하는 일본 기업도 나왔다. 일본 오피니언 리더들은 “무역을 외교적 무기로 사용하는 방식이 오히려 상호 불신을 심화시켰다”며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한·일 관계 정상화를 계기로 민간 차원의 협력도 활발해지고 있다. 양국 상공회의소는 지난 6월 부산에서 6년 만에 회의를 열고 2025년 오사카-간사이 세계박람회의 성공과 2030년 국제박람회의 부산 유치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회의에서 후쿠오카 상공회의소는 양국에 새로운 관광 루트를 만들어 유럽과 미국 등에서 관광객을 유치하자고 제안했다.
한·일 경제협력의 견인차는 역시 양국 경제계다. 이 점에서 도쿠라 마사카즈 일본 게이단렌 회장(스미토모화학 회장)이 ‘월간 게이단렌 10월호’에 기고한 보고서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 보고서는 ‘한·일 경제 관계 강화를 위한 발걸음 착실히 내딛다’는 제목을 달았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경제계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구축을 위한 길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양국 정부를 비롯한 관계 각계의 협조를 얻어 다음과 같은 주요 활동을 전개해 왔다. 첫째, 윤 대통령 초청 한-일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개최. 2023년 3월 윤 대통령의 방일에 맞춰 양국을 대표하는 경제인들이 참여하는 '한-일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을 전경련과 공동 주최했다. 둘째 '한일미래파트너십기금' 설립. 윤 대통령 방일 기회에 김병준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당시)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한일미래파트너십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일 양국은 '한일미래파트너십기금'을 조성해 공동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7월 서울에서 '제1차 한일미래파트너십기금 운영위원회'를 개최해 공동사업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게이단렌과 전경련은 향후 기금 공동사업으로 (1) 청년인재 교류, 대학생-고등학생 교류, 교원 교류 등 (2) 산업협력을 통한 경제안보, 스타트업 연계, 엔터테인먼트-콘텐츠 등을 두 축으로 삼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셋째 한-일 산업협력 포럼에서 양국 간 협력 가능성 논의. 같은 달, 양 기관은 양국의 산업 협력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한일 산업협력 포럼'을 서울에서 개최했다. 포럼에서 참석자들은 양국의 글로벌 공급망 구축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또한, 한·일 협력은 양국 간 협력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의 지속가능한 사회 실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넷째, 새로운 ' 한일 경제위원회’ 설치. 게이단렌은 2023년 5월 31일 총회에서 '한-일경제위원회(위원장: 사토 야스히로 경단련 부회장 겸 미즈호금융그룹 특별고문, 이와타 게이이치 스미토모화학 사장)'를 신설했다. 이날 첫 회의에는 윤덕민 주일한국대사를 초청했다. 다섯째, 한·일은 중요한 파트너로서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 한·일 양국은 DX(디지털 전환)·GX(그린 전환), 저출산·고령화 대응 등 많은 공통의 사회적 과제를 안고 있으며, 한·일 기업들은 이러한 과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경제안보와 글로벌 공급망이 세계의 화두가 된 지금 일본도 관민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세계 각국은 인플레이션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만, 지정학적 상황으로 인한 공급망 재편, 탈탄소를 위한 에너지 공급 방식 등 복잡하게 얽힌 여러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번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는 미·중 대립과 탈탄소 대응 등 세계를 안정적으로 이끄는 리더십 발휘가 기대된다.
과거 무역흑자 대국이던 일본도 2022년에 무역적자가 18조엔으로 확대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일본은 제조기술 입국의 존재감 유지를 목표로 한다. 탄소중립 전원을 기반으로 한 첨단산업의 일본 회귀와 아시아 지역과의 동맹 강화를 동시에 추구하려 한다. 게이단렌이 정부에 촉구하고 있는 정책은 첫째, 국제경쟁력을 갖춘 탄소중립 전원(신재생에너지, 원자력)의 정비와 전국적 효율적으로 전력을 융통할 수 있는 계통연계 강화. 둘째,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의 생산기지로 세계가 주목하도록 비즈니스 환경의 총체적 점검. 셋째, 산학협력을 통한 혁신 등이다. 더 이상 대학은 연구, 산업계는 투자와 사회 실현으로 분업하는 시대가 아니라, 연구부터 사회 구현까지 산학협력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아시아의 에너지 전환에 기여하고, 일본과 아시아의 시장 통합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서 보다 대담한 전략을 짜야 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한국과 일본의 이해가 일치된다. 같은 맥락에서 오는 17일 윤 대통령은 방미기간 중에 기시다 총리와 ’한일간 수소·암모니아 공동 공급망 구축‘을 선언한다고 한다. 양측에게 모두 매우 긴요한 협력이다. 양국의 공동 조달로 가격 협상력을 높여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다. 양자 기술에서도 새로운 틀을 마련하고, 한·일 경제안보 협력을 확대한다. 컴퓨터 능력 향상을 위해 반도체 기술 개발에서 한-미-일이 협력한다는 방침이다. 한·일 양국이 공급망과 과학기술 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는 배경에는 정권이 바뀌어도 후퇴하지 않는 미래지향적 관계로 연결하려는 목적도 있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을 포함한 3개국 자유무역협정(FTA)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일 관계 개선은 2019년부터 정체된 3국 협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는 한·일 경제관계 회복이 다시는 뒤틀어지지 않는 지혜를 모으는 데도 힘을 써야한다. 양국 간에는 뿌리 깊은 현안도 있다. 관계가 다시 냉각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경제적 유대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고 박태준 전 국무총리(포스코 명예회장)는 생전에 한·일관계에 대해 “이웃 국가와의 사이에는 의견 차이와 마찰이 항상 있다. 앞으로는 합리적인 마찰이 훨씬 늘어날 것이다. 지도자들이 정치적 갈등을 잘 관리하고 경제로 파급되지 않도록 하는 상상력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시 새겨봐야 할 고견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