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이의 브랜드이야기] 여성의 워너비 '샤넬'이 직접 모조품 만든 까닭은

2023-11-14 12:00

[사진=샤넬 홈페이지]
‘진주 목걸이, 트위드 재킷, 리틀 블랙 드레스···.’
 
프랑스 명품 패션 하우스 ‘샤넬(CHANEL)’의 창시자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은 성별의 경계를 허물고 여성복에 해방감을 부여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가브리엘은 패션계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샤넬은 당시 남성용 의상에만 쓰였던 저지(기계로 짠 두꺼운 직물로, 손으로 짠 털옷과 같은 느낌이 나는 소재)를 활용해 유연성을 갖춘 여성복으로 만들었다. 여성들의 허리를 옥죄었던 코르셋을 벗게 했다.

특히 옷에 활용하지 않던 트위드(양모로 짠, 거칠어 보이는 직물) 소재를 이용해 우아한 여성복으로 재탄생시켰으며, 모조 진주 액세서리를 통해 보석을 ‘부의 상징’이 아닌 ‘패션’으로 승화시켰다.
 
가브리엘은 진취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며 남들의 시선과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옷을 만들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의 상징이 된 가브리엘 샤넬 덕분에 패션 브랜드 샤넬은 여성들의 워너비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코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싫어했던 가브리엘 샤넬의 과거
188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난 가브리엘은 수녀원의 보육원에서 자랐다. 가브리엘은 보육원에서 봉제 기술을 배웠고 이것이 샤넬 패션의 토대가 된다.
 
그녀는 18세에 보육원에서 나와 파리의 모자 봉제회사에 다니며 저녁엔 물랭 시내 가게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곳에서 부르던 노래는 “누가 트로카데로에서 코코를 보았나”였다. 군 장교들이 그녀를 ‘코코’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코코 샤넬’을 만들어 준 셈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코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야 했던 당시의 기억이 그녀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기 때문에 언급하기 조차 싫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테레즈 보니(Thérèse Bonney)가 촬영한 파리 깡봉가 31번지 샤넬 부티크, 1929년 [사진=샤넬 홈페이지]
가브리엘은 예비역 장교였던 에티엔 발상(Étienne Balsan)을 만나면서 상류층 사회를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후 1910년에는 보이 카펠(Boy Capel)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 깡봉가 21번지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 가게를 차린다. 수수하고 간편한 샤넬의 모자는 상류층 여성들에게 외면받았지만, 이후 유명 연극 배우가 연극에서 샤넬 모자를 착용하면서 인기를 끈다. 
 
1913년 가브리엘은 휴양지 도빌에 최초의 부티크를 오픈하면서 점차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1915년에는 프랑스 비아리츠에 첫 번째 꾸뛰르 하우스 오픈하고 컬렉션을 선보인다. 1918년에는 파리 깡봉가 31번지에 있는 건물을 매입하고 꾸뛰르 하우스를 세운다. 이 건물에는 부티크와 살롱, 공방이 갖춰져 있으며, 아직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샤넬의 주요 상품인 무릎까지 오는 치마와 진주 목걸이, 리틀 블랙 드레스 등. [사진=샤넬, 인터넷 캡처]
 
◆20세기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물하다…편하고 아름다운 여성복의 시작
가브리엘은 단순하고 편리한 옷을 좋아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9) 당시 샤넬의 실용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의 옷이 빛을 발하게 된다. 당시 전쟁이 발발하면서 여성의 노동력이 요구됐고 샤넬은 남성 속옷에 사용하던 얇고 가벼운 저지 천을 투피스에 활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1924~1935)이 발발했을 1924년에는 최초의 코스튬 주얼리(모조품으로 만든 보석)를 만든다. 상복에만 쓰이던 검은 색상을 최초로 여성의 일상복에 적용한다. 그때 탄생한 것이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다. 이는 파리의 유니폼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 
 
전쟁 직후에는 다시 여성들이 우아하고 화려한 실루엣의 의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당시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은 코르셋과 풍성한 스커트로 허리 라인을 강조한 ‘뉴 룩(New Look)’을 공개했고, 이는 곧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했다. 
 
하지만 샤넬은 트렌드에 따르지 않고 신축성이 좋은 소재인 저지, 진주 등을 활용해 편안한 의상이 주를 이룬 컬렉션을 선보였다. 당시 파리와 유럽에서 혹평이 이어진 것과 달리 미국 패션계에서는 ‘현대 여성의 욕구에 부합하는 옷’이라고 극찬했다. 
 
미국 잡지에 실린 샤넬 [사진=샤넬]
 
◆샤넬이 직접 만든 ‘모조품’ 진주 목걸이의 패션화
브랜드들이 인기를 얻으면 으레 모조품과의 전쟁을 치르기 마련이다. 명망 있는 명품 브랜드라면 더 많은 모조품을 양산하게 된다. 브랜드에서 이를 막기 위해 특허권을 소유해도 우후죽순 양산되는 모조품을 모두 잡아내기란 쉽지 않다.
 
명품 브랜드들이 모조품 확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과 달리 샤넬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브랜드에서 직접 모조품을 생산해 내며 공식적으로 판매했다. 장인 정신으로 상품을 제작해 그 가치를 입증하고자 하는 명품 브랜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샤넬의 코스튬 주얼리 [사진=샤넬]
샤넬은 1924년 가짜 보석으로 만든 ‘코스튬 주얼리’를 내놓는다. 세계 최초였다.

귀금속이 아닌 재료로 만든 액세서리로 만든 브로치와 목걸이 등은 당시 큰 비난을 받았지만, 가브리엘은 ‘보석은 부나 집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패션을 위한 액세서리여야 한다’며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만든 진주 모조품 목걸이를 착용하고 다녔다.
 
이후 모조 진주 목걸이는 샤넬의 고전이 됐고 대중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았다. 이에 힘입어 샤넬은 1934년 패션 액세서리 컬렉션을 선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귀금속 품귀 현상이 일어나면서 샤넬의 실용적인 코스튬 주얼리는 더욱 인기를 끌게 된다. ‘모조품은 명품이 될 수 없다’는 공식을 깨트린 셈이다.
 
칼 라거펠트가 수석 디자이너로 있을 당시 샤넬 컬렉션 [사진=샤넬]
 
◆칼 라거펠트 만나 젊어진 ‘샤넬’ 제2의 전성기
1971년 가브리엘 샤넬이 세상을 떠난 뒤, 1983년 칼 라거펠트가 샤넬 디자이너로 영입됐다. 라거펠트는 당시 침체기를 겪던 샤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우아함의 상징이었던 트위드 재킷을 캐주얼한 스타일로 활용했고 하위문화의 상징이었던 데님과 가죽을 활용한 재킷도 인기를 끌었다. ‘C’ 두 개가 겹쳐 있는 샤넬의 트레이드마크를 가방이나 패션에 사용한 것도 라거펠트였다.

라거펠트는 기존 샤넬 아이템을 대중적인 문화 요소와 조합해 샤넬을 젊고 캐주얼한 브랜드로 만들었다. 샤넬의 향수 사업을 확장하고 시계를 출시하며 샤넬의 매출을 올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라거펠트는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8년까지 50여년 동안 수석 디자이너로 샤넬의 패션을 이끌었다. 타임지는 2012년 그를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100명의 패션 아이콘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칼 라거펠트가 선보인 샤넬 컬렉션 화보 [사진=샤넬]
샤넬은 가브리엘 샤넬과 향수 사업을 같이 시작했던 피에르 베르타이머의 가문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샤넬은 알랭 베르타이머와 제라드 베르타이머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비상장 개인기업으로 기업에 대한 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샤넬의 두 CEO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내 손끝에서 피어난 전설이 더 발전하고 번성하기를 꿈꾸며, 샤넬이 오랫동안 행복한 브랜드로 남기를 바란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며 진취적인 여성상을 보여준 가브리엘 샤넬. 그녀는 시대를 거슬러 현대적인 룩의 영원한 본보기가 되는 스타일을 창조했다. ‘고전은 영원하다’라는 말처럼 가브리엘 샤넬은 떠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여성들의 워너비’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