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의 비욘드 ESG] 아이 모습을 한 AI로봇이 '인간'에게 희망인 세상

2023-10-16 06:00

[안치용 교수]



 
영화 <크리에이터>의 ‘알피’가 ‘인간’에게 희망인 세상
 
10월 3일 개봉한 <크리에이터>는 인류의 존망이 달린 AI와 전쟁을 그린 영화다. 포스터나 홍보물만 봐서는 이러한 소재를 다룬 다른 영화와 외관상 설정이 흡사해 스토리가 익숙한 SF영화 같다. AI가 LA에 핵폭탄을 터뜨린 후 인류와 AI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인간이 승리하는 쪽으로 종전의 기대가 높아가는 시점이 영화의 무대다. 주인공인 전 특수부대 요원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흔쾌하지 않았지만 실종된 아내 마야(젬마 찬)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에 특별작전에 합류한다.
이 작전의 목표는 AI 진영에서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인류를 위협할 강력한 무기와 이 무기를 만든 ‘크리에이터’를 찾아서 무기와 창조자를 모두 없애는 것이다. 이 무기와 창조자를 제거하면 AI 진영이 패배하고, 제거에 실패하면 AI 진영이 승리한다. 그 무기는 아이 모습을 한 AI 로봇 ‘알피’였다. 알피의 ‘크리에이터’인 조슈아의 아내 마야는 둘 사이에 생긴 복중 태아를 복제하여 알피를 만들었고 알피는 인간처럼 성장한다. 알피는 마야를 엄마로 생각하고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한다. 사실 극중에서 인간과 다른 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크리에이터’의 ‘human’과 ‘person’=마야가 알피의 엄마라면 조슈아는 논리상 아빠가 된다. AI를 “프로그래밍이지 인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조슈아에게 이런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와 달리 시간이 흐르며 조슈아는 알피가 인간임을 혹은 인간과 동일한 존재임을 받아들인다.
알피에게도 정체성 혼란이 있다. 알피가 조슈아와 대화하며 자신과 조슈아가 ‘천국’에 못 가는 이유로 조슈아는 착하지 못해서,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알피가 인간을 ‘person’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human’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시나리오에서 왜 ‘human’ 대신 ‘person’을 채택했을까. 아마 동물권 논의에 주요한 기여를 한 철학자 토머스 화이트의 ‘비인간 인격체(非人間 人格體·non-human person)’란 용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이 용어에는 ‘person’과 ‘human’이 모두 들어간다.
‘human’을 법률 용어로 풀면 ‘자연인’ 정도로 번역되는 ‘natural person’이다. 회사와 같은 법인(法人)은 ‘juridical person’ 또는 ‘legal person’이다. AI 로봇 알피가 되고자 하는 존재는 ‘human’이 아니라 ‘person’이다. 어느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알피가 실제로는 ‘person’이 아닌 ‘human’을 썼을 것 같다. 영화에서는 공들여 ‘person’이란 단어를 등장시켰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AI 묵시록을 그리지 않았다. AI와 인간(human)이 동등한 인격체(person)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소재로 삼았다.
▲새로운 인격체의 기준=동물권 담론은 생태주의와 맞물려 새롭게 주목받는 윤리적 영역이자 일종의 존재론이다. 동물권을 옹호하며 화이트가 제시한 ‘비인간 인격체’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Alive(살아 있음)
Aware(자아 인식)
Feels pleasure and pain(기쁨과 고통을 느낌)
Has emotions(감정을 가지고 있음)
Possesses self-consciousness, personality(자의식과 개성을 가지고 있음)
Exhibits self-controlled behaviour(통제된 행동을 할 수 있음)
Able to recognise and treat other persons appropriately(타인을 적절히 인식하고 대우할 수 있음)
Exhibits higher order intellectual abilities(고등의 지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음)
 
비인간 인격체는 학문적으로는 물론 동물권 운동에서 (일부) 동물의 대안적 명칭으로 활용된다. 미국 동물보호단체 ‘비인간 인격체 권리 프로젝트(NhRP·Nonhuman Rights Project)’에서 이 용어를 아예 단체명에 넣었다. 유인원, 코끼리, 돌고래 등이 비인간 인격체로 자주 거론되는 동물에 해당한다. 동물권 옹호 단체들은 동물 전시·공연 금지와 동물실험 철폐를 주장한다.
2021년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동물을 ‘법인’으로 인정했다. 미국 법원은 콜롬비아 마그달레나강 유역에 거주하는 하마가 소송의 원고로서 요청한 사안을 받아들였다. 동물의 소송 당사자성이 인정된 특별한 사례다. 이에 앞서 2013년 5월 인도 정부는 돌고래 수족관을 금지하며 돌고래를 권리를 가진 비인간 인격체로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동물의 권리가 헌법에 명시됐다. 2002년 독일 헌법 20a 조항이 “국가는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으로서 헌법 질서 범위 내에서 입법을 통하여 그리고 법률과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행정과 사법을 통하여 자연적 생활 기반과 동물(Lebensgrundlagen und die Tiere)을 보호한다”로 바뀌었다. ‘Lebensgrundlagen’ 다음에 ‘동물(und die Tiere)’을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비판 또한 존재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개념은 인간 중심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인간이 판단한 인격을 중심으로 고등동물을 정의했으며, 더불어 고등동물만이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근본적으로 회사와 같은 다른 법인과 달리 동물은 법인으로 인정되더라도 수동적 존재에 머물며 결코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인간이 파악한 동물의 권리를 인간이 대리할 따름이다.
화이트의 비인간 인격체 논의를 보며 동물보호단체에서 말하는 고등동물보다 오히려 영화 <크리에이터>의 AI로봇이 그 조건에 더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인 알피뿐 아니라 등장한 거의 모든 AI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AI 승려까지 나온다. AI가 영혼과 영성까지 추구하는 풍경이 흥미롭게 그려졌다.
다만 동물과 달리 <크리에이터> 속 AI는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가올 미래라고 할 때, 더구나 동물과 달리 AI는 권리를 ‘주체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할 때 동물권 담론에 도입된 비인간 인격체 개념이 AI로봇에 적용되는 건 불가피해 보인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화이트의 조건 중 ‘Alive’가 무엇보다 쟁점이 될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인간 중심주의 발상이지만 <크리에이터>처럼 AI가 인간(person)으로 인정받으려면 ‘불쾌한 골짜기’의 문턱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불쾌한 골짜기’는 인간이 로봇 등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볼 때 그것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더 많은 호감을 느끼게 되지만 유사성이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호감도가 하락한다는, 즉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론이다. 1970년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가 소개한 개념이다. 여기서 ‘불쾌(Uncanny)’는 독일 정신과 의사 에른스트 옌치가 1906년에 제시한 ‘Das Unheimliche’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불쾌’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살아 있지 않아 보이는 존재가 사실은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는 데에서 비롯한 감정이다. 가장 비근한 예로 좀비를 떠올리면 되겠다.

 



‘골짜기(Valley)’는 호감도와 닮은 정도를 변수로 한 그래프 모양 때문에 생겼다. 모리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래프상 곡선은 크게 3개 국면으로 구성된다. 인간은 로봇이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수록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비슷한 정도가 특정 수준으로 치솟으면 인간의 감정에 거부감이 생기면서 호감도가 하락해 곡선 또한 상승에서 하강으로 돌아선다. ‘Uncanny’ 혹은 ‘Das Unheimliche’가 개입하기 시작한다. 하강 곡선은 ‘비슷한 정도’가 훨씬 더 강해진 또 다른 특정 수준에 이르면 하강을 멈추고 다시 상승한다. 이렇게 급하강한 후 급상승한 호감도 구간은 그래프상 곡선에서 깊은 V자 모양을 하게 돼 ‘골짜기’를 형성한다. ‘불쾌’와 ‘골짜기’를 결합한 ‘불쾌한 골짜기’의 성립이다.
2019년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국제학술지 <신경과학>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독일 아헨공대 휴먼테크놀로지센터와 공동연구에서 “뇌 전두엽에 위치한 시각피질의 활성화 정도를 통해 ‘불쾌한 골짜기’를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요약하면 실험 참가자 21명을 대상으로 실제 사람, 마네킹, 안드로이드(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인조인간),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산업용 기계 로봇 등 이미지를 보여주며 질문을 던졌고 그 반응을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해 뇌의 어떤 영역이 활성화하는지 확인한 결과 실험 참가자에게서 공통으로 전형적인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나타났다.
<크리에이터>는 영화 <서기 2019 블레이드 러너>(1982년)와 노벨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2021년) 등에 등장한 ‘불쾌한 골짜기’ 문제를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결한다.
극중 대사 “person”과 같은 맥락에서 알피를 포함해 <크리에이터>의 AI는 모두 머리 아래쪽에 구멍이 뚫려 있다. 사람인지 로봇인지 의심을 일으켜 불쾌를 자아낼 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건 다르게 만들어 ‘person’과 ‘human’에 대한 혼동을 차단했다. 그러나 턱이 시작하는 지점에 구멍이 휑하게 뚫린 AI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평화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기후위기가 본격화하면 인간으로서는 동물 보호보다 동물자원 보호가 더 사활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즈음 AI와 관련하여 비인간 인격체 논의가 본격화하지 싶다. 묵시록과 연결돼 기후위기와 쌍으로 내우외환이 될지, 영화 <크리에이터>처럼 공존 가능성이 열릴지 두고 볼 일이지만, 준비는 지금부터 해도 빠르지 않다. 성공적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한 22세기 지구의 주인이 인간(human)이 아닌 건 마음이 아프다. 하긴, 꼭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겸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