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나주 정신](2)백호 임제, 조선관료 사회 허위의식 칼 아닌 詩로 베어버리다

2023-09-25 16:00
지역혼의 재발견-(2)백호 임제
조선시대 관료사회 자유로운 영혼 호방한 기상으로 은유적 비판

백호 임제 초상화 [사진=백승현 교수]
 


봄이 오면 벚꽃나무에는 / 벚꽃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하지만 반지하에는 / 거미줄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봄에 비가 오면 벚꽃잎들이 / 다 훌쩍훌쩍 우는 것처럼

힘이 없어서 다 떨어진다.

반지하에서 비가 오면 / 물이 다 새서 / 거미줄이 다 떨어진다.

사람들도 원하는 게 있으면 / 애교를 부려

눈을 조롱조롱 뜨지 않고 쪼롱쪼롱 뜬다.

다음에 또 벚꽃이 피면 그때는 / 내가 더 활짝 피고 싶다.

- ‘조롱조롱 봄의 이야기’ 광주 양산초 김혜림

지난 4월 일곱 번째 ‘백호 임제 어린이 글짓기 대회’가 나주에서 열렸다. 그때 최고상인 백호상을 받은 김혜림 어린이의 시다. 백호 임제가 태어난 나주 회진에는 2013년에 지은 백호기념관이 있다. 이곳에 당시 수상작들이 수놓아져 있다. 글짓기 공통 주제는 ‘봄이 오면’. 눈을 쪼롱쪼롱 뜬 아이는 반지하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을 보며 봄은 희망이고 꽃도, 시(詩)도 희망이라고 노래한다.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는 한문 소설 '화사(花史)'에 450년 후 한 아이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이 이런 구절을 남겼다. ‘꽃은 번화하면서도 봄바람에 번화함을 감사하지 아니하며 꽃은 떨어져도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것을 원망하지 않으니 사람이 어찌 꽃처럼 어질 수 있으랴?’

16세기 조선 선비사회에서 가장 개성적인 시와 글을 남겼던 천재 문장가이자 시인인 임제는 시편과 문장 1000여 수로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한순간이라도 꽃처럼 어진 순간을 살아보았느냐고···.

백호기념관에 걸린 임제 영정을 들여다보고 영모정으로 간다. 영산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나주 임씨 대종가가 왜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영산강은 깊고 푸르렀다. 임제의 묘는 영산강 일대 회진, 가야산, 구진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자리 잡았다. 회진은 마한 때부터 존재했고 나주 임씨들이 630년을 살았다. 1520년(중종 15년) 임비의 7세손인 임붕이 정자를 짓고 귀래정(歸來亭)이라 했다. 임붕이 타계하자 아들 임복, 임진, 임몽과 함께 정자를 고쳐 짓고 아버지를 길이 추모한다는 뜻에서 영모정(永慕亭)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백호문학관 [사진=백승현]

첫 제주도 유람기 ‘남명소승’ 남겨

임제는 1549년 나주 회진에서 태어났다. 그가 즐겨 쓴 백호(白湖)는 외가가 있던 옥과현 섬진강 지류다. 아버지는 임진. 임제 외손자인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 묘비에는 ‘타고난 재질이 절등하여 하루에 수천 언(言)을 외울 수 있었고 문장이 호탕한데 시에 특징이 있었다’고 어린 시절 임제를 평했다.

임제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호협하고 병법을 좋아해서 벼슬길을 위한 학문에 관심이 없었다. 22세 되던 1570년 비로소 속리산에 찾아가 대곡(大谷) 성운(成運·1497~1579)을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중용(中庸)을 800번 독파했다고 한다. 이때 ‘의마부(意馬賦)’를 지었다. 말처럼 날뛰는 자기 마음을 담은 독특한 산문이었다.

‘나 임제는 성질이 거칠고 뻣뻣한 사람이라 어린 시절에 공부를 하지 않고 자못 호협하게 놀기를 일삼아 기방이며 술집으로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이 이십이 가까워서야 비로소 배움에 뜻을 두게 되었다. 하지만 힘써 배운 것이라고는 글귀를 교묘하게 가다듬고 정문(程文)을 지어서 시관(試官)의 눈을 현혹시키고 당대에 명성을 얻으려는 데 지나지 않았다.’

여러 번 낙방하고 나서 과거에 합격했다. 28세 때 소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정자에 제수됐다.

제주목사인 부친에게 문과 급제 사실을 알리려 제주도에 갔고 눌러앉아 '남명소승(南溟小乘)'을 썼다. 어사화 두 송이, 거문고 한 벌에 보검 한 자루와 부친이 기르던 호총마를 타고 제주를 3개월 동안 유람한 기록이다.

제주도 지리, 기후, 인심, 풍토, 생업, 언어, 특산품을 기록하고 감회를 시로 읊었다. 제주 여행기로는 임제가 처음이었다. 한라산 백록담에도 올랐다.

“··· 최정상에 도착하자 그곳은 움푹 파여 못을 이루고 있다. 석봉이 둘러싸여 주위가 7~8리나 돼 보였다. 바위에 기대어 굽어보니 물은 유리알같이 맑아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 ··· 그 우뚝 융기한 형상이나 바위가 쌓인 모양이 무등산과 흡사한데 높고 크기는 배나 되는가 싶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무등산과 한라산은 암수로 짝을 이룬 산이다' 하는데 필시 이 때문일 것이다.“

1578년 30세 때 상경하는 길에 남원 광한루에 들러 3월 백광훈, 이달, 양대박과 시회를 한 후에 '용성수창집(龍城輸唱集)'을 펴냈다. 이 합동 시집으로 임제의 시문학이 조선 땅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모정 [사진=백승현]

관료사회 모순을 시(詩)로 비판

임제의 시대는 4대 사화가 끝나고 사림문화의 꽃이 피었지만 동서분당의 폐해가 여전하고 부패한 관료들의 가렴주구가 이어졌다.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극에 달했다. 임제는 혼란한 시대를 비판하고 관습에 종속되지 않았다. 중국에 속박되기 싫어했고 호방하고 자주적인 기질로 살았다. 하지만 아웃사이더였다. 당시 관료사회에서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제의 문제의식은 그 지점에서 발화했다. 세상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았다. ‘나처럼 시대를 비웃고 자유분방하게 사는 선비의 기질도 용납되어야 하지 않는가? 뛰어난 시 정신은 새로운 세상을 위해 첫눈이 쌓인 길을 걷는 것 아닌가?’ 허위와 가식의 세계를 과감히 내쳤다.

우주 간에 늠름한 육척의 사나이 /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마음은 어리석어 예절도 지키기 어렵고 / 지모는 졸렬하여 가난한 삶 사양치 않네. -‘이 사람’ 중에서-

 

백호 임제 시비 [사진=백승현]

벼슬살이가 이어지는데 함경도 안변 고산도 찰방으로 부임해 양사언, 허봉, 차천로 등과 시집을 만들었고 기행시로 남겼다.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이라는 한문 단편소설도 이때 썼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일어난 ‘계유년 사건’을 문학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한문소설 '화사(花史)'는 봄·여름·가을 등 세 계절에 피는 꽃 중에서 매화·모란·부용 등 세 꽃을 군왕으로 삼은 의인체 소설이다.

'수성지(愁城誌)'는 천군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훌륭한 신하들에게 보필을 받으면서도 천군이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충신 의사들 원혼의 호소를 풀어주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낸다고 비판하는 소설이다. 임제의 한문소설은 모두 정치 현실과 관료사회를 비유와 은유로 비판하고 있다.

32세 때인 1580년 서도병마평사로 부임했다. 스승 대곡 성운이 별세하자 '대곡선생제문'을 지었다. 묘향산에서 휴정을 만나기도 했다. 34세 때 해남현감, 35세 때 평안도도사를 지냈다.

 

영모정에 있는 물곡비. [사진=백승현]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슬퍼하노라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평안도 도사로 부임할 때 임제가 송도 명기 황진이 묘소에서 지었다는 시조가 기록돼 있다. 이 시로 조정의 비판을 받았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었는가 /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나니 /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이를 슬퍼하노라.

또 평양 부벽루에서 시회를 열고 '부벽루상영록'을 펴냈다. 황징, 이인상, 김명한, 노대민 등이 참여한 시회에서 자기 운명을 예견하는 듯한 시를 쓴다.

불우한 이 사람 누가 알아보랴 / 세상에 알려지길 광객(狂客)이란 이름으로 / 변새의 산하에 노상 나그네 되어 / 글과 칼로 오래 종군을 하노라.

막부(幕府)의 해를 넘긴 꿈 / 돌아갈 마음 한 골짝의 구름일레 / 인생은 본디 헤어지기 마련인 걸 / 어찌 잠시의 나뉨을 애석해 하랴!

1587년 6월 부친상을 당했고 이후 두 달 만인 8월 11일 임제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9세.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挽詞)도 자기가 지었다. 죽음마저도 호협한 의식으로 가지고 놀았다.

강호상에 풍류 40년 세월에 / 맑은 이름 얻고도 남아 / 사람들 놀래었네. 이제 학을 타고 / 티끌 세상 벗어나니 / 천도복숭아 또 새로 익으랴.

영모정 앞에 물곡비(勿哭碑)가 있다. 성호 이익(李瀷·1497~1579)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이렇게 적었다. “임백호는 기상이 호방하여 검속당하기를 싫어했다. 병으로 죽음이 가까워져 아들들이 슬퍼하자 ‘사해의 여러 나라가 황제를 칭하지 않은 자가 없거늘 유독 우리나라는 자고로 그러지 않았다. 이런 나라에서 살다가 가는데 어찌 애석해 할 것이 있겠느냐. 곡하지 말라’고 했다.” 물곡(勿哭)은 ‘울지 말라’는 뜻이다

내 주검 앞에서 울지 마라
임제의 자주의식은 그가 생전에 정여립과 나눈 이야기에 나타난다. 당시 항우를 논하면서 ‘항우는 천하의 영웅인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며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임제가 죽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 휴정, 유정이 의병과 승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한 것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임제가 살아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맞았다면 분명 그는 지니고 있던 장검을 차고 출전했으리라. 풍류와 자주의식,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을 잊지 못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걱정하는 시혼(詩魂)이 곧 그의 시(詩) 정신이었다. 호남이라는 의향(義鄕)의 뿌리가 되고 자주의식의 바탕이 됐다.

백호문학관과 임제의 묘, 영모정, 나주임씨 대종가는 백호 임제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조선 관료주의 사회의 허위를 시심으로 베어버린 시인. 자유와 해방의 창작 정신으로 동서분당의 그늘을 노래한 문인. 우리는 시대를 초월해 우리 가슴을 울리는 시인 한 명을 비로소 얻게 됐다.

 *참고문헌 : 백호 전집(신호열·임형택 편역), 백호 임제 시선(허경진), ‘중국에서의 백호 임제 문학사상 연구’(황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