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캠프 데이비드 그 이후.. 한‧미‧일 합의 내실 다질때 인데
2023-09-14 06:00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 대해 문정인 연세대 명예교수는 “미국이 얻은 게 가장 많고, 일본도 잃은 것 없이 많은 걸 얻었는데 한국만 준 건 많고 얻은 건 별로 없다”고 했다.(한겨레 8월 26일) 노무현·문재인 정권에서 대표적 이데올로그로 활약해온 그는 한 발 나아가 “(미국 지식인들조차도) 미국 자체가 세계 안보에 가장 심각한 위험이라고 하는데 그런 미국에 모든 걸 올인하는 우리 현실이 더 큰 염려”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외교원 창설 60주년 기념식에서 “아직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반국가세력은 반일감정을 선동하고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협력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했다. “예측 가능성을 못 주는 외교로는 신뢰도 국익도 얻지 못한다”며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외교관과 국제정치 석학들과 소통함으로써 우리 외교에 통찰을 주는 담론을 형성하고 이끌어 달라”고 했다.
이에 앞서 전직 외교관 235명(‘나라 사랑 전직 외교관 모임’)은 캠프데이비드 합의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한·미 동맹이 형해화(形骸化)되고 한·일 관계는 최악이었던 상황을 회상하면 캠프데이비드 회의는 그 자체가 극적인 반전”이라고 했다. 이들은 “한‧미‧일 3국 정상이 세계적 핵심 이슈에 대해 공통의 가치관에 따라 한목소리로 상황을 주도하겠다고 결의하고,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공식 지지했다”고 평가했다. 이 모임 공동대표인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조원일 전 베트남 대사는 북방정책을 일선에서 수행했던 정통 외교관 출신들이다.
외교란 상대방이 있게 마련이어서 섣부른 낙관도 비관도 금물이지만 필자는 캠프데이비드 합의에 대해 긍정적이다. 국방연구원은 ⓵한‧미‧일 3국 협력의 제도화 ⓶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안보협력체 구성 ⓷위협에 대한 신속한 협의 기제 구축 등 3가지를 가장 큰 성과로 들었다.(이수훈,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 성과와 과제', <동북아안보정세분석>, KIDA) 공감한다. 건국 이래 우리가 총체적 차원에서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우방과 이렇게 넓고 두텁게 연대를 형성한 적이 있었나 싶다.
편협한 小國主義에서 벗어나야
물론 우려도 있다. 한‧미‧일 간 결속이 강해지면 대척점에 있는 중국‧러시아‧북한 간 결속도 강해져 이에 대처할 부담도 커진다는 것이다. 일종의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다. 한반도와 주변 역학관계에 그런 속성이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 외교가 총체적 위기에 빠질 것”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대화와 협력은 사라지고 전쟁의 위협이 횡행할 것”이라는 주장 등은 지나치다. “중국 견제가 핵심인 바이든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윤석열 정부가 적극 수용함으로써 한국 외교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환경의 군사적·이념적 진영화(陣營化)는 심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그렇다. 경계(警戒) 수준을 넘어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될까 봐 두렵다. 그러나 국제관계는 언제나 경쟁과 협력, 안보와 대화가 함께 간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게 외교다.
김정은의 訪러, 절묘한 타이밍
김정은(39)의 러시아 방문과 북·러 정상회담이 과장된 우려와 불안감을 부채질한 측면이 있다. 푸틴에게서 식량과 에너지 또는 핵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첨단 기술을 받고, 그 대가로 재래식 무기를 제공하는 거래가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과 보도가 한‧미‧일 대 북‧중‧러 간 대결 구도의 심화를 뒷받침해주는 형국이 됐다. 김정은이 4년여 만에 러시아를 방문한 것이 공교롭게도 캠프데이비드 회의 직후에 이뤄짐으로써 이런 상황 인식을 낳은 셈이다.
그러나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아시아담당 부소장은 지난 7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일각에선 동아시아에서 한‧미‧일 간 밀착이 북‧러 간 밀착을 불렀다고 비판하지만 북‧러 간 밀착은 서로의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이자 예정된 수순”이라며 “캠프데이비드 회동이 없었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났을 것”이라고 했다. 어떻든 김정은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이어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번에는 한‧미‧일과 북‧중‧러가 격돌하는 신냉전의 한복판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게 됐다. 의도적이었다면 가히 ‘타이밍의 대가’다.
나는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을 캠프데이비드 체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거나 보려는 어떤 인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다. 그런 북이기에 이제라도 캠프데이비드 체제를 구축한 것은 현명한 대응이었다고 믿는다. 김정은과 푸틴이 유엔 결의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관측대로 모종의 거래를 강행한다면 전후 70년 이상 유지되어온 현상유지(status quo) 체제를 흔드는 중대한 도발일 수 있다. 그 충격파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감당해야 할 지역이 동북아고, 한반도다. 한‧미‧일 공동 대응, 곧 캠프데이비드 체제 차원의 대응이 절대적이다. 달리 무슨 해결책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대한민국이 자신들의 속국이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나라, 방문하는 우리 대통령이 ‘혼밥’이나 먹었던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유사시 한국과 대만 중 어디를?
빅터 차 부소장은 “북이 러시아 측에서 핵잠수함 기술을 넘겨받았을 때 미국은 유사시에 대만과 한반도 중 어디부터 챙겨야 할지 상당한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라며 “지금 워싱턴에서는 대만과 한반도 비상사태가 동시에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고민과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로서는 캠프데이비드 체제라도 갖춰 놓았기에 그나마 다행 아닌가. 이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한‧미‧일 3국 간 합의를 내실화하고, 특히 3국 연대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라는 한·일 관계를 유지·발전시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노무현 정부 때 설익은 ‘동북아 균형자’를 자처했다가 중국의 비웃음을 사고 끝내 꼬리를 내려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진영을 떠나 그때 확인한 게 있다. 균형자는 바로 ‘미국’이라는 냉엄한 현실 말이다. 가까운 장래에도 동북아 균형자는 미국이다. 그 미국을 중심으로 한‧미‧일 3국이 손을 잡았다면 어떻게든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 앞에서 친미·반미 논쟁은 사치다. 설령 ‘안보 딜레마’와 마주치게 되더라도 극복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협력과 대화 등 비군사적 수단을 총동원해 안보 환경을 개선해나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협력안보(cooperative security)'를 지향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바이든의 베트남 외교는 가치외교인가?
외교가 본디 그런 것 아닌가. 우리보다 크고 강한 나라와 상대할 때는 이러저런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그쯤은 극복해야 하고, 극복할 거라고 믿고 싶다. 우리 외교는 엄혹했던 양극적 냉전 시기를 살아냈고, 탈냉전의 혼돈 속에서 북방외교를 통해 이를 극복한 경험과 지혜, 그리고 인적·물적 자원이 있다. 그런 자산과 자신감이 있기에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국가’를 대선의 핵심 공약으로 제시한 것 아닌가. 우리 외교를 정의(定義)도 불분명한 ‘가치외교’라는 허구적 프레임에 가두고, 정부와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자해(自害) 행위에서 그만 벗어났으면 한다. 자유민주주의 나라의 어떤 대통령도 외교관도 ‘국익외교(國益外交)'를 하지 ‘가치외교(價値外交)'를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캠프데이비드 체제의 적실성(適實性)을 놓고 논란 중일 때 바이든 대통령은 베트남을 전격 방문해(10일) 양국 관계를 최고 수준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한 지 50년 만에 중국, 러시아, 인도, 한국과 같은 반열에 올린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양국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해 눈을 돌릴 것”이라고 했다. 이를 놓고 “미국이 북방에서 대중국 봉쇄망을 다진 데 이어 남방에서 포위망 구축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 외교는 ‘가치외교’인가 아닌가.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