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 中 제약회사는 왜 하루에 52회씩 컨퍼런스를 열었을까

2023-09-06 09:24
교육·주택 이어 의료 '대수술'
'리베이트 온상'으로 찍힌 컨퍼런스
의료계 부패 사정… 藥일까 毒일까

최근 중국이 의료계를 정조준해 '부패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헤이룽장성에서 한 공립병원 원장으로 재직한 허씨는 2014년부터 제약회사로부터 구매 의약품의 15%를 리베이트로 받아챙긴 액수만 370만 위안, 우리 돈으로 7억원에 육박한다. 그는 매번 단속에 걸리지 않도록 용의주도하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매번 다른 전화번호를 사용해 제약업체 관계자와 연락을 주고받고, 인적이 드문 폐쇄회로(CC)TV가 설치되지 않은 교외 도로에서 관계자와 은밀히 만났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리베이트를 현금으로 챙긴 후, 친척을 통해 타지의 은행 계좌에 돈을 입금하는 방식이다. 

# 쓰촨성의 한 공립병원 원장으로 재직 중인 류씨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모두 59차례에 걸쳐 컨퍼런스에 참석한 후 20만 위안이 넘는 비용을 상부에 청구했다. 조사 결과 대부분 의료와 전혀 관련 없는 회의로, 청구한 비용 내역도 관광지 숙박이 대다수였다. 게다가 병원 내 의약품·의료기기 구매조달 혹은 병동 인프라 건설 사업 과정에서 입찰을 생략하고 개인적 인맥을 동원해 업체와 계약을 체결한 후 뒷돈을 현금다발로 챙겨갔다. 심지어 뒷돈을 약속된 기한 내 제공하지 못하면 고리대금업자처럼 이자까지 붙여 받아냈다. 그렇게 그가 불법으로 취득한 액수만 1430만 위안, 우리 돈으로 26억원이다.
 
공동부유 외치는 中…교육·주택 이어 의료 ‘대수술’
최근 중국 현지 언론에 소개된 중국 의료계 부패의 현주소다. 중국신문망 집계에 따르면 지난 7월 말부터 이어진 시진핑 지도부의 의료계 반부패 사정 칼날에 뇌물수수·횡령·사기 등 혐의로 180명이 넘는 병원장이 사실상 '낙마'했다.

사정 칼날은 제약회사에까지 번졌다. 이달 초에는 중국 2대 제약회사인 상하이의약그룹 전 부총재를 비롯해 4명의 간부가 당 기율 위반으로 조사를 받았다. 최근 중국에 불고 있는 의료계 반부패 바람에 연루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공동부유’를 외치는 시진핑 지도부는 서민의 생계를 위협하는 3대 지출 분야인 교육·주택·의료 분야를 정조준했다. 사교육과 부동산을 대대적으로 단속한 중국이 이제 의료계에 대한 사정 작업에 나섰다. 정부 관료와 병원, 제약회사 및 의료기기 회사 간에 형성된 광범위한 부패 고리를 끊어 ‘칸빙난, 칸빙구이(看病難, 看病貴, 병원 가기도 어렵고 병원비도 비싸다)’로 불리는 중국 의료계 내 고질적인 병폐를 근절하는 게 목표다. 이러한 부패 고리로 인해 서민들의 의료비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는 게 정부의 시각이다. 
 
중국인 1인당 연간 의료지출비 [자료=중국 위생건강위원회]
 
‘리베이트 온상’ 컨퍼런스만 1년새 1만8800번..하루 52회꼴
의료계에 '부패와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 7월 21일이다. 당시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위건위)를 비롯해 교육부·공안부·심계서·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국자위)·시장감독총국 등 10개 부처가 공동으로 회의를 열고 1년간 전국 의약업계 부패 문제를 집중 단속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많은 부처가 한꺼번에 부패 척결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의료계 리베이트 부패의 온상으로 가장 먼저 칼날을 들이댄 것은 컨퍼런스(학술회의)다. 중국에선 제약회사나 의료기기업체들이 학술회의 후원금을 내거나 초빙 강사 강연료, 참가자 교육비 등의 명목으로 의사에게 리베이트를 건네는 게 공공연한 관행이 됐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에 소개된 모 제약사를 예로 들어보자. 지난해 매출이 9억 위안인데, 이 중 영업 비용이 50%에 달했다. 특히 학술회의를 통한 약품 홍보 비용에 1억4500만 위안을 투입했다. 이 회사가 1년에 개최한 학술회의만 1만8800차례, 하루에 52회 개최한 셈이다. 하지만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이 회사 약품은 이미 출시한 지 10년 이상 된 복제약 3종에 불과하다. 굳이 학술회의를 열어 약을 홍보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학술회의는 의사에게 리베이트를 건네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국 매체 중신재경에 따르면 중국 본토증시에 상장된 제약회사 40곳의 지난해 영업비용은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했고, 일부는 매출보다 영업비용을 더 많이 쓰기도 했다. 사실상 병원을 대상으로 한 리베이트에 천문학적 돈을 쏟아부은 셈이다. 

리베이트에 많은 비용을 쓴 제약회사들은 약값을 올려 받기 때문에 의료계 부조리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의 몫이 됐다. 중국정부망에 따르면 2014년 2586.5위안이었던 중국인 1인당 의료비는 7년 새 갑절로 뛰어 2021년 기준 5338.1위안에 달하고 있다. 

사실 중국 병원 내 리베이트 관행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배경에는 열악한 의사들의 근무 환경도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중국 의학포털 사이트 이쉐제(醫學界)가 중국 의사 222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연평균 수입은 10만700위안(약 1840만원)에 불과했다. 앞서 7월 미국 전미경제연구소가 발표한 미국 의사 연평균 수입인 35만 달러의 20분의1에도 못 미친다. 
 
의료계 부패와의 전쟁… 藥일까 毒일까
글로벌 투자자들도 시진핑 지도부가 진행하는 부패와의 전쟁이 의약계 산업에 미칠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부패 사정 작업의 끝이 어디인지를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뿐만 아니라 성장 잠재력이 큰 중국 의료 분야에 대한 투자를 위축시킬 것이란 우려도 있다. 중국 베이징대 인민병원의 저명한 심장 전문의 쑨닝링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기업의 컨퍼런스 후원조차 조사 대상이 됐다"며 "중국 의학 발전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이미 중국 증시에서 의약주는 곤두박질쳤다. 의료계 부패와의 전쟁이 시작된 7월 말부터 8월까지 약 한달새 중국 제약회사 헝루이제약 주가가 15% 가까이 빠진 것을 비롯해 푸싱제약(12%), 의료기기업체 마이루이(12.5%) 등 주가가 10% 이상씩 빠졌다. 

중국 시장조사업체 윈드사에 따르면 3월 이후 중국증시 기업공개(IPO)를 신청했다가 갑작스레 취소된 제약회사만 12곳이다. 의료계 사정부패 칼날 속 당분간 제약회사의 IPO도 힘들 것이란 게 업계의 관측이다.  

중국의 의료 부패와의 전쟁에 다국적 제약회사도 불안해졌다. 아스트라제네카나 노보노디스크 등 다국적 제약사들은 매출의 10% 이상을 중국에서 벌어들일 정도로 중국은 매우 중요한 시장이다. 특히 최근 중국인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의약품 시장도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피치솔루션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내 의약품 매출은 지난해 2116억 달러에서 2026년엔 2645억 달러(약 349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전략 컨설팅 기업 LEK 컨설팅의 상하이 의료 부문 책임자인 헬렌 첸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부패와의 전쟁에 따른) 중국 시장의 매출 성장세 둔화를 적극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 의료계 부패와의 전쟁이 단기적으론 시장에 타격이 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시장이 건전한 발전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의견도 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사이먼쿠처앤파트너스의 중국 생명과학 부문 책임자인 브루스 류는 FT를 통해 “단기적으로 중국 내 부문 전체 매출에 타격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투명한 영업 홍보를 추구하는 다국적 제약회사가 오히려 수혜를 입을 수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