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재조명] '한미동맹' 그의 선택이 옳았다
2023-08-15 18:00
① 선진한국의 기틀 마련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편집자주] 15일로 광복 78주년을 맞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해방정국 3년(1945~1948년)과 뒤이은 ‘건국’에 관한 성찰의 시간을 되풀이해서 갖게 된다. 일제에서 해방되긴 했으나 상이한 이념과 체제로 남북은 갈라졌고 그 상처는 여전히 우리를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건국절(建國節) 논란 하나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8월 15일이 광복절이면 건국절은? 기미 독립선언을 한 1919년 3월 1일인가, 아니면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인가.
때마침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바람이 거세다. 건국 대통령인 그를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되짚어 봄으로써 왜곡을 걷어내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취지에서다. 그동안 우남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부정 일변도였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주경제는 광복 78주년을 맞이해 우남 이승만 시대와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의미를 재조명하는 기획칼럼을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우남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지도자도 없다. 진보 좌파 진영의 대표적 저술가인 김삼웅(80‧전 민주당보 주간, 독립기념관장)이 쓴 <이승만 평전>(2020 두레)을 보자. 우남은 천하에 몹쓸 지도자다. 책의 부제부터가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4백 쪽이 넘는 이 책에서 우남을 긍정 평가한 대목은 서문에 쓴 다음 글이 전부다.
“젊은 시절 개혁적 선각자였고, 독립협회에 소속돼 개화운동에 참여, 만민공동회 연사와 제국신문 주필 역임, 6년여 투옥, 하와이 한인학원 운영과 태평양잡지 창간, 구미 위원부의 외교활동,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참석과 한국독립 호소 등은 업적에 속한다.”
김삼웅은 “정직한 연구가들은 이승만의 공과(功過)를, 공 3, 과 7 정도로 평가한다.”고 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뚱(毛澤東)을 ‘공칠과삼’(공은 7, 과는 3)으로 평가했다는 일화를 비틀어 인용한 것인데 그렇다면 ‘공 3’에 대해서라도 충분히 언급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없다. 현대사 연구자인 서중석(75‧성균관대 명예교수)이 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조봉암과 이승만, 평화통일 대 극우 반공독재>(2016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금의 이승만 재평가 바람은 이런 극단적인 ‘우남 평가’에 대한 반발 또는 자성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지난 7월 26일 원로 우남 연구자인 유영익 교수(87‧전 국사편찬위원장)가 별세했다. 유 교수는 이화장(梨花莊)문서 연구로 우남 연구의 지층을 한 단계 높인 학자다. 이화장은 우남이 1948년 대통령이 돼 경무대(청와대)로 옮기기 전에 살았던 집이다. 유 교수는 우남의 양아들인 이인수(李仁秀)로부터 10만여 장의 방대한 문서를 넘겨받았다. 연세대 재직 중에는 현대한국학연구소도 설립했는데 이 연구소로부터 분리돼 나온 게 지금의 ‘이승만연구원’이다.
우남에 대한 유 교수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그가 쓴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2019년 청미디어)에 따르면 “우남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착실한 건국의 비전을 갖춘 인물”이었다. “우남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의 급진적 개혁 지도자로서 대한제국의 정치제도를 혁신하려고 했을 때 품었던 꿈을 소중히 간직했다가 해방 후 건국과정에서 실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비전은 “신생 한국을 아시아의 모범적 예수교국가, 동양의 모범적 자유 민주주의 국가, 반공의 보루, 평등한 사회, 교육수준이 높고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박민식 보훈장관은 “우남이 자유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공칠과삼’(功七過三)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로도 부족하다. 그에게 과오가 있다고 해도 동상 하나 못 세울 정도는 아닐 거”라고 했다. 공감한다.
우남의 줄 ···자유민주주의
우남이 장기집권을 위해 변칙적으로 헌법을 고치고(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는 등 비민주적 행태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큰 그림’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남은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은 건국 대통령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인류의 보편적 이념과 가치로 말이다. 당시로선 기적 같은 일이다. 전후(戰後), 세계 각지에서 30여 신생 독립국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처음부터 나라의 근본을 그렇게 설정한 국가는 드물었다. 대한민국이 우남 이후 한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거의 유일한 신생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우남의 혜안과 노선, 신념 덕이다.
필자는 주니어 기자 시절 남북대화를 일선에서 취재한 경험이 있다. 그때 북측 인사들은 사석에서 우리 측 관계자들에게 푸념 또는 시샘 비슷하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솔직히 같은 민족인데 남쪽이 우리보다 뭐 특별히 잘나서 이렇게 잘살게 됐소? 그저 줄을 잘 선 것뿐이지!” 어떤 ‘줄’일까. 공산주의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의 줄, 곧 우남의 줄이다.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는 “현행 체제를 87년 체제로, 상공업이 전면에서 경제개발을 이끌던 체제를 5·16 체제”로 보고 “이 두 체제는 우남의 48년 체제가 아니었으면 나타날 수 없었다.”고 했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은 우남의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는 “한국과 함께 출발한 다른 국가들과의 비교방식에 따른 평가여야 한다.”면서 “우남은 신생 독립국들의 민주주의 모델을 만들어낸 위대한 혁명가”라고 했다. (자유경제원, 광복 70년 토론회 2015년 7월)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선택
우남은 신생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체결)에 기초한 한미동맹을 택했다. 냉전의 심화 속에 한반도는 이미 분단 됐고, 북은 월등한 군사력으로 남을 압박하고, 일본은 미국의 전략적 고려에 힘입어 재부상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그는 미국에 기댔고 미국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게 현실적으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우남의 판단이 옳았음은 그 후의 우리 현대사가 웅변한다.
1953년,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분단된 채로라도 휴전협정에 응하라고 성화를 부리던 그 무렵,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다. 변방의 최빈국 중의 하나였던 한국이 세계 최강 미국과 1대1로 상호방위조약을 맺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어떻게든 한국에 발목을 잡히는 일은 피하려고 했다. 미국으로선 굳이 한국이 아니더라도 일본을 통해 동북아에서 공산주의를 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미국을 움직이기 위해 우남은 이해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기상천외의 한 수를 놓는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놀랐다. 우남은 국제사회에서 ‘트러블메이커’, 또는 ‘한다면 하는 지도자’로 각인됐다. 이승만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지낸 김일주 전 고려대 겸임교수(정치학)는 “휴전협정이 체결되어버리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유야무야 될 수도 있음을 우남은 우려했다.”고 말했다. 이런 우남이 미국에게는 늘 눈엣가시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뒷날 회고록에서 우남을 “공산주의자들만큼 미국을 힘들게 했던 자”라고 했다. 미국은 한때 우남을 제거하기 위해 ‘에버레디 플랜’(Plan Everready)이란 비밀계획까지 세웠다.
국사편찬위의 박진희 편사연구관의 분석이다. “우남은 한미관계를 통해 안보를 보장받고 더 많은 원조를 얻어내려고 했다.…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전적으로 미국에 달렸다고 생각했다.…일본에 대한 의혹과 경계도 미국을 지렛대 삼아 방어하려고 했다.” 박 연구관은 “원로 역사학자 방선주(90‧한국현대사 연구가)는 우남을 객관적 정세와 조건을 고려해 일본에 대한 강온 양면 전술을 구사한 현실주의적 정치가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적 인물로 평가한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현실주의자를 위한 변명> 동녘 2013년)
우남은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이미 미소(美蘇) 양극에 의한 냉전(冷戰)의 시대가 왔음을 알았다. 그가 해방 직후인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만들자”(정읍 발언)고 했을 때 북은 소련과 조선로동당 주도하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는 전 북한주재 소련대사였던 스티코프의 일기 등 옛 소련 측 문서에 의해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남은 ‘분단의 원흉’이 돼 있다. 이런 인식은 당시 김구(1876∽1949년) 김규식(1881∽1950) 등 남북협상파들이 추구했던 ‘통일된 조국의 꿈’과 우남의 ‘단독정부’ 주장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더 심화된 측면이 있다. 젊은 시절,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를 읽고서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백범은 존경받아야 할 지도자이고, 남북협상(대화)도 해야 했을지 모르지만, 적화(赤化)라는 실존적 위협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남은 이를 알았고 피하지 않았다.
건국의 기초
우남이 깔아놓은 건국의 기초 위에서, 한국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미국의 유력 시사주간지 ‘US 뉴스 & 월드 리포트’가 지난달 31일 발표한 강대국 순위에서 프랑스(7위)와 일본(8위)을 제치고 조사대상 25개국 중 6위에 오를 정도다. 윤 대통령은 18일 한 미 일 3국 정상회의(캠프데이비드)에 참석한다.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과거 우남은 일본의 부활을 우려했고, 미국의 힘을 빌려 이를 견제하려고 했다. ‘외교에는 귀신’이란 소리를 들었던 우남이 지금 살아있다면 어떤 조언을 할까.
우남(1875∽1965)은 왕족 출신으로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16세손이다.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독립운동에 나섰고, 배재학당과 미국의 명문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정치학 박사)을 나온 엘리트로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지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하야해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한다. 평소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으나 그에 못지않게 자유민주주의와 개혁에 대한 신념도 강했다. 그의 재임 중에는 6‧25 전쟁 통에도 지방 면장선거가 치러졌다. 농지개혁과 의무교육도 실시됐다. 일찍이 에너지의 중요성을 알아 당시 문교부(교육부)에 원자력과를 설치하기도 했다.
김일주 교수는 “우남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바로 그 체제(자유민주주의)에 의해 하야했고,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국민에게 민주주의 위대성을 학습시켰다.”면서 “우남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4‧19를 폄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