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탄생 100주년] 광복군에서 시대의 스승으로…정치권 영입 고사하고 평생 학자의 길
2023-08-15 05:00
해방 前 한·미 합작 특수훈련 참여…영어 익혀
고려대서 36년간 후학 양성…美 지원기관 찾아가 자금 유치
민주화운동 당시 권력에 미운털 박혀…학생들 사퇴 반대 시위
박정희·노태우·YS 총리 제의 거절…보수·진보서 존경받는 인물
25일부터 31일까지 김준엽 주간…고려대박물관서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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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존경받아야 하는 어른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던 독립운동가셨어요. 정부 측에서 국무총리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끝까지 학자로 남으며 자존심을 지킨 분입니다."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최근 서울 종로구 아주경제 본사에서 열린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김 선생을 이같이 회고했다. 김 전 장관은 198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시절 김 선생과 사제 간을 뛰어넘는 깊은 인연을 맺었다.
올해는 김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1923년생인 김 선생은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으로 활약했으며 광복 후에는 교육자로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중국 대학을 거쳐 1949년 고려대 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1985년까지 36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3년간은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지난 9일 아주경제 본사에서 열린 기념 좌담회에는 행사를 기획한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 이진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장(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송양섭 고려대 박물관장(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이 참석했다. 다음은 좌담회 일문일답 내용.
-김준엽 선생은 어떤 분이었나.
전두환 정부는 당시 대학 학생대표를 학생들 직접투표로 선출하지 못하게 법으로 규제하고 있었다. 고려대가 1984년 당시 직접투표로 학생대표를 선출하자 총학생회장을 제적하라고 압박했다. 김 전 총장은 당시 학생들이 정당한 권리로 학생대표를 뽑았는데 제적을 요구하는 것은 반교육적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김 전 총장은 결국 정권에 미운털이 박혀 총장을 그만뒀다. 당시 학교에서 '총장 사퇴 반대 시위'가 일어난 것은 처음이다. 김 전 총장은 이를 훈장처럼 생각하셨다.
-김준엽 선생 별명이 '큰 거지'라고 들었다.
이 원장=김준엽 전 총장 취임 당시 시설 인프라 투자가 늦어져 대학에 어려움이 많았다. 강의실이 부족했고 교수들은 연구실이 없어서 대학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흔했다. 김 전 총장은 행정가로도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총장들 중에서 가장 많은 후원금을 유치하셨다. 건물과 도서관을 지으면서 부족한 시설을 확충할 수 있었다. 당시 구자경·이병철·정주영 회장 등 많은 기업인을 찾아다니면서 후원금을 유치하셨다. 김 전 총장은 인품 있으시고 강직하고 용기가 있으신 분이었다.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후원금을 유치하는 게 안 어울릴 수 있는데 부끄러움을 접어두고 행동하셨다.
-김 선생이 총장에 취임한 뒤 고려대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데.
이 원장='과학고대'라는 표현이 처음 쓰였다. 이전까지 고려대는 인문사회계열이 강하고 의대는 약했다. 김 전 총장은 처음으로 고려대에 과학도서관을 짓고 공과대 투자를 시작했다. 고려대 구로병원이나 여주병원은 당시 규모가 굉장히 작았다. 그런데 김 전 총장께서는 고려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학·의학 분야가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 이후 고려대 자연계열이 빠르게 성장했는데 첫발을 내딛은 분이 김 전 총장이시다. 또 재임 당시 학교 재정 문제로 교수진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 전 총장은 서울신탁은행에서 빚을 내서 교수진에게 대신 월급을 주시고 본인 월급이 들어오면 갚아나갔다. 김 전 총장이 재임하시면서 고려대 재정이 정상화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행정가로서도 탁월하셨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도 만들었다.
이 원장=지금은 대학마다 많은 연구소가 있지만 당시에는 드물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당시 아세아문제연구소)은 1957년 설립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함께 대학 최초 부설 연구기관이다. 김 전 총장은 부소장을 맡으셨다. 당시 한국이 냉전 최전선에 있어 북한이나 소련, 중국 연구 필요성이 제기됐다. 김 전 총장은 미국 포드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개항기 시대 외교 문서들을 책으로 내는 일을 하셨다. 당시 자료를 지금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어 연구자들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아세아문제연구소 재직 당시에 별명이 '작은 거지'였다고.
이 원장=김 전 총장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실 때 중국어를 배우셨다. 한·미 합작 특수훈련에 참여하시면서는 영어를 익혔다. 이 능력을 활용해 미국 대학 교수와 대학 지원기관을 찾아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자금을 끌어오셨다. 이 돈으로 아세아문제연구소 건물을 지었다. 연구원 고용도 늘리고. 그 덕분에 1960~1970년대 아세아문제연구소는 한국을 대표하는 동아시아 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근대화 관련 학술회의도 많이 개최했다. 동아시아와 서구 연구자들이 모여 근대화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장이 됐다.
-고려대를 넘어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될 인물로 불리는 이유는.
이 원장=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패턴이 있다. 업적이 있으면 인물에 대해 흠이 따라붙는다. 이렇게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고려사열전, 조선왕조실록이 그렇다. 김 전 총장은 독립운동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공적은 보이지만 흠결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에서도 영입 제안이 잇따랐다. 박정희·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 등 자리를 제안받았다. 하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학자의 길을 걸으셨다. 한국 사회와 정치인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송 관장=작금의 우리 사회는 본으로 삼을 어른이 없는 상황이다. 김 전 총장은 우리 시대 어른이 될 수 있는 분이다. 이번 박물관 행사 주제는 시대의 스승, 추모문화제 주제는 시대의 어른으로 잡았다.
-'김준엽 주간'을 맞아 준비한 행사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김 전 장관=오는 26일 고려대 인촌기념관 대강당에서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추모문화제 취지는 선생님을 추억하자는 것이다. 출연진이 150명가량 된다. 고려대 동기회 합창단 6개 팀이 독립군가부터 우리 시대 좋은 가곡들을 부른다. 또 광복군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선생과 함께했던 분들과 선생을 회고한다. 김준엽 선생 삶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행사를 준비했다.
고려대 학생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는 행사다. 이 자리를 빌려 정식으로 초대한다. 고려대 동문들이 김 전 총장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자발적으로 행사를 기획했다. 독재정권에 맞서 저희들을 위해 희생하시다가 물러나셨다. 이번 행사는 그에 대한 보답이다.
김준엽 선생
△1923년 평안북도 강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 동양사학 중퇴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중국 난징 국립동방어전문학교 강사 △고려대 사학과 교수 △유엔 총회 한국대표 △중국학회 회장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제9대 고려대 총장 △고려대 문과대학 사학과 명예교수 △2011년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