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반도체 야망'…"눈높이 낮춰야 길 보인다"

2023-07-12 10:12
아시아 비즈니스 리뷰
미중 갈등에 새 투자처 급부상…모디 정부 100억 달러 인센티브 앞세워
인도 최초 '마이크론 공장' 내달 첫삽…중앙·지방정부서 70% 보조금
수익성 낮은 조립·테스트 공정이지만 경쟁력 충분…시작이 중요

 
올해 3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작은 선물을 받았다.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 NXP세미콘덕터의 커트 시버스 최고경영자(CEO)는 모디 총리에게 반도체가 새겨진 회색 명판을 줬다. 이 조그마한 명판은 인도의 ‘반도체 제조 허브’를 향한 원대한 꿈을 보여준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뒤이은 공급망 혼란으로 반도체 병목 현상이 일어나자,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동남아시아 등 전 세계가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반도체를 손에 쥔 나라가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인도 역시 반도체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 가운데 인도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미·중 긴장 고조로 인도가 차이나 플러스‘원’으로 도약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다. 차이나 플러스원이란 중국에만 투자하는 것을 피하고 다른 유망한 개발도상국 등으로 투자를 다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 정부는 이 기회를 잡기 위해 지난해 반도체 현지 제조 촉진을 위한 100억 달러 규모의 정부 인센티브 제공을 승인했다. 그러나 인도가 직면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로이터통신, 테크모니터 등 외신은 인도가 반도체 제조 허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선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최근 보도했다.
 
마이크론 인도 투자, 8억 달러로 27억 달러 거저 먹기?
‘반도체 볼모지’ 인도에 사상 처음으로 반도체 공장이 들어선다.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인도 구자라트주에 추진 중인 반도체 공장이 내달 중 삽을 뜬다. 아슈위니 바이슈나우 인도 정보통신부 장관은 이달 초 공개된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마이크론의 공장이 내년 12월부터 가동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도 언론들은 마이크론의 투자 결정에 잇달아 환호했다. 하지만 투자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마이크론의 인도 공장 건설에는 총 27억 5000만 달러가 든다. 인도 중앙정부가 50%를, 구자라트주 정부가 20%를 보조금으로 제공한다. 마이크론은 30%만 투자한다. 마이크론 입장에서는 8억25000만 달러만 투자하고 27억5000만 달러짜리 공장을 100%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유럽 기술 전문 매체인 이이뉴스 유럽(eeNews Europe)이 ‘극단적인 수준의 보조금’이라고 칭한 이유다.
 
더구나 마이크론의 인도 공장은 반도체 제조보다는 기술 수준이 낮은 패키징, 조립 및 테스트가 중심이다. 사실상 인도 정부는 마이크론이 미국과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 첨단 반도체를 인도에서 조립하고 테스트하는 데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것이다.
 
미국과 중국 역시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위해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두 나라가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등에 인센티브를 준다는 점에서 인도와는 다르다.
 
애플의 최대 협력업체인 대만 폭스콘이 최근 인도 반도체 공장 투자 계획을 번복한 점 역시 인도의 야망이 흔들리고 있는 점을 보여준다. 폭스콘은 인도 에너지 철강 대기업 베단타와 구자라트주 아메다바드에 195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합작 투자를 철회했다. 이후 폭스콘이 인도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겠다고 강조했지만, 외신들은 인도의 꿈이 첫발부터 삐걱대고 있다고 짚었다.
 
인도의 100억 달러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한 세 기관 중 현재까지 인도 정부의 승인을 받은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폭스콘-베단테 컨소시엄은 무너졌고, 이스라엘 반도체 회사 타워반도체가 참여하는 컨소시엄 ISMC의 30억 달러 투자는 인텔의 타워반도체 인수로 중단됐다. 싱가포르 IGSS의 30억 달러 규모 투자도 인도 정부가 인센티브 신청서를 다시 제출할 것을 요구하면서 기약이 없는 상태다.
 
인도 정부가 마이크론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한 것은 최근 실추된 모디 총리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모디 총리가 이끄는 여당 인도국민당(BJP)은 최근 실시된 두 차례의 주의회 선거에서 패배했다. 내년 총선을 앞둔 모디 총리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그래도 길은 열렸다…동남아와 경쟁할듯
 
극단적인 수준의 보조금을 지급했더라도 마이크론의 인도 투자가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나온다. 마이크론의 인도 투자가 대만의 ASE테크놀로지, 중국의 JCET 등이 지배하고 있는 반도체 조립, 패키징 및 테스트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첨단 반도체를 제조하거나 디자인하는 것에 비해서는 수익성이 낮은 편이나, 이 시장 역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지온마켓리서치에 따르면 조립, 패킹징 및 테스트 분야의 전 세계 매출은 2028년까지 509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아날로그칩의 지난해 전세계 매출은 20% 증가한 89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메모리, 로직 및 기타 유형의 칩 성장세를 앞지른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인도가 눈을 낮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더 낮은 목표가 인도의 반도체 야망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울 것이란 설명이다.

특히 미국이 대중국 디리스킹 전략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첨단 반도체 생산은 자국으로 유치하고, 저가형 반도체 생산 혹은 조립 및 테스트 등은 인도 등으로 이전할 가능성이 크다. 인도가 미국, 중국, 한국, 일본이 아닌 말레이시아와 경쟁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말레이시아는 반도체 패키징·테스트 수탁인 OSAT(Outsourced Semiconductor Assembly and Test) 시장의 약 13%를 차지하고 있다.
 
올해 3월 인도와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중국과 대만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기로 했다. 당시 인도를 방문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 장관은 "앞으로 인도와 협력관계를 강화해 나갈 것이며 인도가 (반도체 공급망 분야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겠다는 열망을 이루길 바란다"고 말했다. 러몬도 장관이 말한 협력관계는 마이크론의 사례와 유사한 모습으로 먼저 전개될 것이란 게 외신의 분석이다.

물론 인도가 지닌 강점도 상당하다. 저렴한 노동력을 포함해 거대한 국내 시장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대한 노출도를 줄일 수 있다. 넓은 영토도 이점이다. 기술 노하우를 보유한 싱가포르의 경우 작은 면적으로 인해 물리적 확장 여지가 적다. 젊은 인구도 강점이다. 유엔은 중국의 중위연령이 지난해 38.5세에서 2024년에는 48세로 높아질 것으로 봤다. 인도는 같은 기간 27.9세에서 35.6세가 된다.
 
타이 후이 JP모건자산운용 아시아태평양 시장 수석 전략가는 “인도는 ‘플러스원’이 되기 위해 여러 동남아시아국과 경쟁할 최적의 위치에 도달했다”며 “미국과 인도 간 최근 외교 관계 진전은 인도의 매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