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숙 칼럼] ​당연한 것에, 용기 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

2023-05-15 20:01

[임혜숙 교수]

 
30년 전 미국 유학 시절 수업에서 느꼈던 학생들의 나라별 특성이 있다. 한국 학생들은 대부분 조용히 앉아 경청하는 편이다. 미국 학생들은 수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건 그렇지 못하건 다양하고 가끔은 엉뚱한 질문으로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인도 학생들도 비교적 활발하게 발언하는 편이었다. 그 두 나라 학생들은 영어를 잘하니까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중국 학생들은 우리나라 학생이나 마찬가지로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지만, 알아듣기 쉽지 않은 영어라도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발언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놀랍게도 교수님들이 중국 학생들의 질문을 잘 알아듣고 친절하게 답해주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강의시간에 활발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을 많이 탓했었다.
 
대학 강단에 서게 된 후, 우리 학생들은 나와 같은 소극적 모습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학생들의 이해정도를 파악하면서 수업을 진행하고 싶어서 이런저런 노력을 많이 했지만, 강의시간에 학생들의 발언을 끌어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궁금한 것이 있거나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질문하고 싶어도, 분위기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수업에서 발언하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짧지 않은 기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학생들이 질문이나 대답 등을 통해 수업에 참여해야 하는 기본횟수를 정하고 성적에 반영하는 정책을 시도해 보았다. 이 정책 덕분인지 지금은 수강생이 80명 내외의 대형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학생들이 강의시간 중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대부분 학생은 내 강의에서 발언하기 위하여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거나 용기를 낼 필요가 없게 되었고, 발언 거리를 찾고자 오히려 수업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는 공대 졸업생 중 여학생 비율이 3% 남짓이었다. 2000년대에도 ‘공대 아름이’라는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 TV 광고가 나올 만큼 공대에 재학 중인 여학생은 매우 소수였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이 발표한 ‘2021년 남녀과학기술인력 현황’에 따르면 2021년 공대 재학생 중 여학생 비율은 23.4%, 졸업생 중 여성 비율은 21.4%로 매우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1996년 이화여대에 여자대학으로는 세계 최초로 공대가 설립되었고, 2015년 숙명여대에 공대가 설립된 효과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제 여학생들은 공대에 진학하기 위하여 남다른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된다. 이에 반하여 공과대학에 재직 중인 여성 교수 비율은 21년 기준 7.3%에 불과하고, 산업기술인력 비율은 11.0%에 불과하여, 공과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여학생 대비 여교수 비율이나 산업기술인력 비율은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기혼여성 중 경력단절 여성 비율이 가장 높은 전공계열은 공학으로 21.6%에 달하고 있다. 이는 의약 15.9%, 자연 17.0%, 인문사회 18.1% 등과 비교하여 월등히 높은 수치이다. 모든 계열의 기혼여성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결혼, 출산과 육아에 따른 경력 이탈 현상에 더하여 공대를 졸업한 여성들이 속하게 되는 조직의 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절대다수가 남성인 조직 내에서 소수 여성은 자신이 속한 환경을 변화시키기보다 순응하려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고, 이런 조직문화에서의 승진 사다리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까닭이라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식과 사고, 가치관은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는지를 반영한다. 여성 인력의 적극적 활용은 조직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직면한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여성 인력들이 능력을 발휘하고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과 제도를 더 열심히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성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22년 5월 발표한 ‘성평등한 정치대표성 확보를 위한 정책권고’에 따르면 21대 국회에 선출된 여성 국회의원의 비율은 19%로, 국제의회연맹 기준 세계 190개국 중 121위이자, 전 세계 평균 여성의원 비율 25.6%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비례대표 공천할당제에 따라 비례대표 의원 47명 중 여성은 28명으로 59.6%이지만, 지역구 의원 전체 253명 중 여성은 29명으로 11.5%에 불과하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성별 불균형은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역대 광역자치단체장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으며, 2018년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기초자치단체장의 여성 비율은 3.5%에 불과하다.
 
다양한 사회적 가치들의 권위적인 배분 활동을 담당하는 정치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대표성을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성평등의 핵심이다. 여성들이 적은 비율로 정치에 참여하는 상태에서 사회적 역할만을 확대한다면 여성의 상대적 지위는 계속 약화될 것이다. 현행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 선거제도가 여성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원인을 규명하고,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적절한 자격과 경험을 갖춘 여성들이 더 많이 국회에 진출하고 자치단체장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
 
용기 내지 않아도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 시대의 시민으로 권리를 누리거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제도 및 시스템, 사회 분위기, 인식과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것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면서 문화선진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세계에 보여주어야 할 품격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 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 제50대 대한전자공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