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휘 칼럼] 서방의 대러제재 효과가 미미했던 이유
2023-02-23 16:41
미국·영국·유럽연합(EU)은 러시아가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독립국가로 공식 승인한 작년 2월 21일부터 전략물자 수출 통제, 러시아산 석유·가스 수입 금지, 최혜국대우(MFN) 박탈,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접근 제한, 러시아 중앙은행 외환보유액 동결, 해상·육상 운송 제한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제재를 부과하였다.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에는 호주·캐나다·뉴질랜드·노르웨이·일본·싱가포르·대만 등도 유사한 조치를 도입하였다. 우리나라도 2월 28일 전략물자 수출을 제한하였으며 3월에는 금융 제재를 추가하였다.
이번 대러시아 제재에는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기업도 자발적으로 참가하였다. 인구 1억5000만명에 막대한 영토와 부존자원을 가진 세계 10위 경제대국을 포기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손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투자한 1000개 넘는 기업들이 투자 철회, 영업 중단, 생산 중지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러시아 시장에서 나왔다. 놀랍게도 중국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신개발은행(NDB) 같은 다자개발은행은 물론 중국은행, 중국공상은행(ICBC), 중국석유화공과 같은 국유기업과 DJI, 샤오미, 유니언페이, 화웨이, 바이낸스 등도 대러시아 제재에 참여하였다.
러시아는 세계 3대 산유국이자 2대 석유 수출국이라는 점에서 에너지 기업이 동참한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러시아 석유 개발에 수십 년간 관여했던 미국 엑슨모빌, 영국 BP와 쉘, 노르웨이 에퀴노르가 투자를 중단하기로 발표하였다. 러시아 국영석유기업 로스네프트 지분을 20%나 보유하고 있는 BP가 최대 250억 달러 손실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쉘은 러시아 천연가스에 의존도가 높은 독일이 작년에 완공한 노르트스트림2 프로젝트에서 탈퇴하였다.
주요 선진국뿐만 아니라 많은 다국적 기업까지 제재에 동참했기 때문에 대러시아 제재는 강력한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되었다. 2014년 크림반도 점령 이후 제재로 러시아는 경기 침체, 환율 하락, 외환보유액 축소 등 삼중고에 시달린 바 있었다. 그러나 최근까지 러시아 경제는 2014년과는 사뭇 다르게 안정적인 상태다. 2022년 4월 달러 국채 원금과 이자 상환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러시아는 6월에 1918년 이후 최초로 디폴트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러시아의 상환 능력과 의지가 아니라 미국의 금융 제재에서 기인했기 때문에 디폴트가 외환위기로 전화되지 않았다. 2022년 하반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전환된 것을 제외하고 물가와 환율이 잘 관리되고 있으며 무역수지와 외환보유액도 양호한 편이다. IMF는 지난 1월 세계경제 전망에서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이 올해 0.3%, 내년 2.1%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유례없는 경제제재 효과가 제한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우선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서방의 제재를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대비책을 준비했다. 러시아는 3월 7일 제재에 참여한 총 48개국을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고 보복을 천명하였다. 통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꾸준히 확충하는 동시에 달러화 비중을 낮춰왔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 중앙은행은 SWIFT 결제망에 대한 대안으로 금융메시지전송시스템을 구축하였다.
EU로 수출하지 못한 에너지 자원은 대러시아 제재에 참여하지 않은 중국, 인도, 튀르키예 등이 구매하였다. 이러한 제재 우회 전략에 맞서기 위해 G7, EU, 호주는 2022년 12월 5일부터 러시아산 원유 상한액을 배럴당 60달러로 제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2023년 2월 1일부터 7월 1일까지 다섯 달 동안 이 조치에 동참한 국가에 원유 수출을 금지하는 대통령령을 12월 27일 발표하였다. 이런 러시아의 적극적 대응으로 가격 상한제가 제대로 지켜질 가능성이 높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러시아 재제 성과와 한계는 우리나라 경제안보에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통상국가라는 점에서 자유무역을 위축시키는 경제 제재는 우리 국가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제적 차원의 제재에 동참하면서도 공급망을 훼손하지 않도록 경제안보 외교 전략을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구사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할린 석유전과 가스전 투자를 철수하지 않은 일본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한·러 관계 악화가 북·러 관계 호전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북한이 포탄을 공급하는 대가로 러시아에서 원유와 식량을 공급받고 있다는 징후가 분명해지고 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를 규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성명에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반대하고 있다. 한·러 관계를 방치한다면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도발을 응징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왕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외교학과 ▷런던정경대(LSE) 박사 ▷아주대 국제학부 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