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협박' 없는 성폭력 처벌..."비동의 강간죄 도입"vs "억울한 피해자 나올 수도"
2023-02-09 15:27
피해 사례 중 70% 폭행·협박 없어
여성가족부가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번복하면서 관련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각지대에 놓인 성폭행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과 반발을 우려해 판례를 통해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고 있다.
9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따르면 직장 내 선후배나 학교·문화예술계 사제 관계에서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가 잇따라 보고되고 있다. ‘폭력·협박’ 없이 생기는 성폭력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과 판례를 통해 점진적으로 입증 책임을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성폭력 구성 요건 지나치게 좁아···비동의 강간죄 필요"
비동의 강간죄는 형법 제297조 강간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자는 내용이다. 도입을 찬성하는 측은 현행법이 지나치게 좁게 성폭력을 판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리거나 더 큰 불이익을 우려해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데 ‘피해자의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로 강력한 폭행·협박이 있어야만 강간죄가 인정돼 처벌 공백이 생긴다는 지적이다.
성범죄는 ‘블랙박스’에서 벌어진다고 할 만큼 피해자 진술 외에 다른 증거가 적고 피해 발생 후 기간을 두고 고소가 이뤄지는 사례가 많다. 특히 권력 관계에서 물리적인 저항 없이 장기간 발생한 성폭력은 더욱 입증하기 힘들다. 2018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사건에서 1심 재판부가 “위력 행사 정황이 없다”며 내린 무죄 판결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업무상 위계·위력에 의한 간음죄’ 조항으로 처벌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업무상 위력’을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는 반론도 적잖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는 '업무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빠져나가기도 한다”며 “강간 구성 요건에 ‘폭행·협박’이 있어 다른 강간 범죄도 좁게 해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입 시 부작용···판례 쌓으며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이미 폭행·협박 유무에 무게를 두던 잣대가 당사자 간 합의 여부로 옮겨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신민영 형법 전문 변호사는 "이론상으로는 검찰이 협박·폭행 등 강간 구성 요건을 입증하기 어렵지만 현재 입증 책임이 상당 부분 완화돼 있다"고 말했다. 유왕현 변호사(법무법인 새서울)도 "과거와 달리 대법원이 부부 사이에도 강간을 인정하는 등 사회 인식 변화와 발맞춰 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간 입증을 좁게 해석하는 관행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입법만 이뤄질 시 백래시(backlash·사회 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괜히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하려다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수사기관과 재판부에서 동의 여부를 중요하게 다루도록 점진적으로 판례를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전날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범죄를 의심받는 사람이 현장에서 동의가 있었다는 것을 법정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억울하게 처벌받게 된다. 상대방 내심을 파악하고 입증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울 것"이라며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우선돼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