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의료 붕괴] "밀리면 안 돼" 부모들, 소아과로 RUN!

2023-01-19 16:44

[사진=연합뉴스]

 
“오늘 예약에서 밀리면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으니까 이렇게 일찍 나와 줄을 서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해요. 오늘이라도 진료를 할 수 있으면 다행이죠. 내 자식이 아픈 거라 정말 애가 탑니다.” 

지난 15일 워킹맘 김지현씨(38)는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서울 마포구 소재 A소아과로 달려갔다. 7세 아들 감기 진료 예약을 하기 위해서다. 오전 7시 50분 도착. 건물 내 상가는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라 제법 어두컴컴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김씨는 익숙하게 병원 문 앞 계단에 걸터앉았다.

최근 자녀가 있는 부모들 사이에 병원 문을 열기 전부터 긴 줄을 서는 일명 ‘오픈런(Open-Run)’이 늘었다. 김씨는 “가장 먼저 대기 순서를 잡아야 오전 내 진료를 보고 오후엔 회사에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아 일찍부터 서둘렀다”고 말했다. 

오전 9시, 김씨 뒤에 부모 10여명이 줄을 선 후에야 간호사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나와 진료 접수를 시작했다. 

A소아과 간호사는 “매일 자정 앱(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진료 예약을 받는다. 그 밖엔 현장 접수를 한다”면서 “다만 현장 접수는 1시간에 1~2명 정도 진료가 가능해 (진료 시간이) 오후로 밀리거나 예약을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날 온라인 진료 예약에 실패한 어머니들이 아침부터 줄을 선다”면서 “보통 10명 내외”라고 귀띔했다. 

◆ 필수의료 공백 위기 현실화···정부·의료계 이견에 갈등↑ 

필수의료 공백은 이미 현실화했다. 어린 생명을 다루는 소아청소년과 붕괴 위기가 특히 심각한 수준이다. 

대한병원협회가 올 상반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를 모집한 결과에 따르면 전국 67개 수련병원 전체 모집 정원 207명 중 지원자는 33명(16.4%)에 불과했다. 모집 정원을 채운 수련병원은 전국에서 단 두 곳뿐이었다.

의료체계 위기는 이미 곳곳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인천 가천대 길병원은 소아 입원진료를 잠정 중단했다. 단 한 명도 전공의 지원자를 받지 못하면서다. 서울아산병원에선 근무하던 간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수술할 의사가 없어 결국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소아과뿐만 아니라 내과·외과·산부인과 등 국민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 분야를 담당하는 의사 부족이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면서 정부는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의대 정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의료계는 정부를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내면서 대치 중이다. 의대 정원 확충이 필수의료 강화를 위한 해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1인 시위로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은 물론 조규홍 복지부 장관 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수가 등 처우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 회장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나 뇌수술을 하는 신경외과 전문의가 부족한 것은 의대 정원을 늘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며 정부 대책을 겨냥해 “무능하다”고 비판했다.

대한의사협회도 우려를 표했다. 의협은 “의사 인력 수급 문제는 의료 수요자와 공급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영향을 받는 사안”이라며 “우리나라 보건의료제도와 재원 등도 충분히 고려해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측 간 의견이 극명하게 갈려 있어 합의에 이르기엔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다만 정부가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의대 정원 확대를 언급하고 속도감 있는 협의를 공언한 만큼 지난 정부 때와 달리 논의에 진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엔 ‘어느 정도 규모를 늘릴 것이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사진=의정부 을지대병원]


◆ 필수과 기피 현상·지역 의료 격차 등 과제 산적···“의료 정책 방향 설정할 시점” 

의료계에선 의대생 정원을 늘려도 필수과 기피 현상이 계속되면 효과를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전공의 정원 대비 지원율 하위에 소아청소년과(27.1%)가 꼽혔다. 올 상반기는 상황이 더 악화했다. 소아청소년과 충원율은 16.4%로 더 낮아졌고 외과와 산부인과도 각각 65.5%, 78.8%에 그쳤다. 저출산과 비수도권·비인기진료과 기피 현상 등 복합적인 문제가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게 의료계 주장이다. 

다만 지역 간 의료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라 변화는 필요해 보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지역 의료 격차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3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전남이 0.47명으로 가장 적었고 충남이 0.49명으로 뒤를 이었다. 두 지역 종합병원 의사 수는 전국 평균(0.79명)을 크게 밑돌았다. 의사 수가 가장 많은 서울(1.59명)과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이를 두고 의료계에선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등 각종 인센티브에도 지원자가 없어 보험이 병원에 지급하는 수가(酬價) 인상이 만능 열쇠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의대 정원을 놀리되 의료 서비스 공급에서 공공성을 담보할 방안과 인구 변화에 따른 정책 방향 등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권정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복지부가 추진하는 의대 정원 확대와 의료계가 주장하는 처우 개선은 배치되는 사안이 아니다”며 “의사 처우 개선을 위해서라도 의대 정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정부에서 인구 추계를 3년에서 5년 단위로 집계해 정책을 마련하는데 복지부와 의료계도 이처럼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의료계는 업무량, 수가 개선 등 어떤 부분에 있어 처우 개선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정부에 제시하고 조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