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경쟁, 地政學에서 技政學의 시대로
2022-12-19 17:03
《카이스트 미래전략 2023》 분석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러시아 국민들은 소련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매우 싫어한다. 고르바초프가 소비에트연방을 해체함으로써 자국 영토의 일부였거나 소련의 지배를 받던 위성국가들이 독립해 국가안보를 결정적으로 훼손했다는 이유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미군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군대가 폴란드나 발트 3국에 주둔하는 사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은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가운데 러시아만 빼고 나토와 유럽연합(EU)에 모두 가입했다. 이렇게 러시아가 나토 군대와 미군에 둘러싸인 지정학(地政學)적 압박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역사상 어떤 위대한 왕이나 장군들도 지리적 환경의 구속(拘束)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군사외교 전략을 펼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전쟁, 권력, 정치, 사회 발전을 통제한다는 것이 지정학(geo-politics)의 기본적 개념이다(팀 마셜 저 《지리학의 죄수·prisoners of geography》). 지정학은 지리적인 위치나 형태가 국가 이익이나 국가 간 관계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국의 분단도 중국·소련·일본과 인접한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를 놓고 다툰 미국과 소련의 세계 전략 속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냉전시대에 지정학적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로 기능했다.
2015년부터 미래 전략을 계속해서 펴낸 카이스트가 발간한 9번째 보고서 《카이스트 미래전략 2023》은 강대국 패권경쟁에서 국가안보의 중심 도구가 정치외교나 국방과 같은 전통적 안보 개념에서 식량·자원·산업에 이르는 비전통적 안보 개념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지원한 첨단무기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이 주요 표적을 정밀 타격하면서 러시아군은 고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디지털과 반도체 기술을 활용한 무기들이 겨루는 하이테크 전쟁이다. 러시아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더라면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깅렬한 전투 의지와 미국이 지원하는 첨단 무기 앞에서 맥을 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 하이테크 전쟁
《카이스트 미래전략 2023》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시의적절하게 포착해 ‘기정학의 시대, 누가 21세기 기술패권을 차지할 것인가’를 주제로 잡았다.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서문에서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 간 기술패권 경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면서 반도체·배터리·통신 분야에서 첨단 기술력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기술 주권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7대 게임 체인저 기술로 첨단 바이오 기술,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술, 초대형 인공지능과 AI 반도체 기술, 6G 이통통신 기술, 차세대 이차전지 기술, 우주탐사 기술, 양자정보 기술을 꼽았다.
미국은 중국 기술의 급속한 부상과 확산에 대한 자국의 대응을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로 규정한다. 첨단기술을 이용한 권위주의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연대와 중국을 첨단 기술에서 따돌리는 탈동조화(decoupling)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미국의 확고한 인식이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냉전 시대에는 희귀 금속이나 희토류 같은 전략 물자 확보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이 있었지만 기술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경제에 편입되고 중국 시장을 선점하려는 서구 기업들의 대중(對中) 기술 이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미국이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반도체·AI(인공지능)·전기차·첨단 무기·우주항공 등 안보와 직결되고 미래 산업의 우열을 가를 산업에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미국의 의도는 거의 노골적이다. 미국의 강력한 대응에는 첨단 기술을 훔쳐가는 중국에 대한 반감도 기본으로 깔려 있다.
반도체 동맹으로 ‘중국 고립화’ 전략
《카이스트 미래전략 2023》은 미·중 기술패권 경쟁은 가치와 안보를 공유하는 우호 진영 구축 경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기술은 국력과 자주권 그리고 생존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대만에서는 반도체 산업이 일자리와 경제 발전과 함께 안보를 보장하는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고 부른다. 반도체 없이는 대만이 중국 본토의 공격을 받을 때 동맹국들의 지원 의지가 약화할 우려마저 있다는 것이다. 차이잉원 총통은 반도체를 ‘민주주의 칩’이라고 명명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대만에서 생산하는 반도체의 60%를 중국이 수입한다. 대만은 미·중 사이에서 고민이 있겠지만 종국적으로 미국의 대중 수출 통제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대만은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고 미국의 무기 판매와 안보 지원 없이는 생존이 어렵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정부의 행동을 숨기고 국민의 항의를 막는 수단으로 인터넷 폐쇄(shutdown)를 활용한다. 러시아가 디지털 플랫트폼에 침투해 미국의 대통령선거와 영국의 EU 탈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 개입한 것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기술 문제, 국제정치와 연결시켜 바라봐야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을 촉발한 것은 세계 주요 국가들이 중국 화웨이 장비로 5G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세계 1위의 기지국 장비업체로 도약한 화웨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2021년 3월 반도체·안테나·배터리 등을 화웨이에 수출하는 것을 제한했다. 낮은 가격에 5G 통신장비를 공급함으로써 통신망을 장악하고 기술표준을 만들려던 화웨이는 대만의 TSMC가 시스템반도체 납품을 중단함으로써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달 시진핑 주석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와 투자협정을 체결하면서 화웨이를 포함했다. 사우디는 막강한 원유 생산량을 무기로 미국과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려는 듯하다.
아이폰을 대부분 중국에서 생산하는 애플이 미국의 대중 규제 조치를 어떻게 비켜갈지도 주목된다. 그런 면에서 삼성이 베트남에 스마트폰 주력 생산기지를 마련한 것은 기정학적으로 볼 때 미래를 내다본 선택이었다.
《카이스트 미래전략 2023》은 ‘기술 문제를 단순히 경제 분야에 국한해 바라보기보다 국제정치의 구조와 질서, 안보, 가치·규범 등 요소와 연계해 분석하는 융합적 접근과 복합적 외교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