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행 in] 근심은 황매산 지는 해에, 희망은 대암산 뜨는 해에

2022-12-23 00:01
황매산 정상길에 펼쳐지는 억새평원…올한해 쌓인 시름과 아픔이 사르르
대암산 발아래 운석이 남긴 분지 뚜렷…떠오르는 해엔 계묘년 '두토끼' 희망을

2022년은 지독히 시렸다. 살갗을 파고드는 한파보다도 더 매서운 고통이 마음을 생채기냈던, 그런 한 해도 이제 일주일 남짓 남았다.
12월 마지막 날을 슬며시 피해 '호젓한' 일출·일몰 여행을 다녀왔다.
수년간 즐기지 않던 이 여행을 계획하고 행장을 꾸린 이유는 명확했다. 지는 해에 아픔을 실어 보내고, 2023년(계묘년)의 희망을 싣고 위풍당당 차오르는 해를 힘껏 품고 싶었다. 
 

황매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본 일몰. [사진=기수정 기자]

◆황매산에 내려앉은 황금빛 일몰 '장엄'

합천 하면 가장 많은 이가 '황매산'을 떠올린다. 봄에는 붉은 철쭉이, 가을에는 은빛 '억새'가 많은 이의 마음을 뺏는 곳이 바로 황매산이다. 

가을철 억새군락지의 은빛 물결을 이루던 황매산은 시린 겨울에도 찬란하게 빛난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황금빛 일몰에 물든 억새 군락은 절로 넋을 잃게 한다. 

황매산은 해발 1108m에 달하는 합천 명산이다. 가야산과 함께 '양대 명산'으로 불리는 곳이다. 1000m 넘는 산 정상까지 어떻게 올라가냐고 탄식할 필요 없다. 정상 부근까지 차도가 잘 나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책로를 따라 그저 천천히 걸으면 된다.

길은 거의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편안하다. 길을 따라 양쪽으로 억새평원이 넘실댄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억새 천지다.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을 뺏겨 걷다 서기를 반복한다. 차가운 겨울바람조차 상쾌한 봄바람처럼 느껴진다. 잘 닦인 산책로라고 하지만 땀 한 방울 정도 흘리는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

한참을 걷다 우뚝 서니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툭 떨어진 땀방울을 단숨에 실어 나른다. 칼바람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은 그저 발 아래 펼쳐지는 낭만의 물결 덕이리라. 

끝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억새군락을 등지고 일몰 포인트를 찾기 시작할 즈음, 일행이 "저 아래 산성이 하나 있는데 저쪽으로 가보자"고 꾄다. 사실 이곳은 영화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숨은 일몰 포인트란다. 일부는 산성이 발 아래 닿는 지점까지 올랐고, 일부는 산성 가기 전 산책로 옆 억새 군락에 숨어들어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일몰 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10여 분인데 100여 분 남은 것처럼 시곗바늘은 느릿느릿 움직인다. '겨울바람이 봄바람처럼 상쾌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탓한다.

"손발이 시리다 못해 마비된 것 같다"며 투덜대는 순간, 붉은 해가 산 너머로 뉘엿뉘엿 기울어간다. 꽁꽁 얼어버린 손발의 감각은 잊은 채 산자락이 층층이 붉게 물들어 가는 광경을 지그시 바라본다.

숨 막히도록 아름답다. 석양에 물들어 금빛으로 변한 억새평원이 아름답게 춤을 춘다. 차디찬 바람에 실려 움직이는 억새의 춤사위가 어찌나 낭만적인지 켜켜이 쌓인 시름과 아픔이 사르르 녹는 듯하다. 

곧 있으면 황매산 전역이 칠흑처럼 어두워지고 캄캄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잊고 살았던 황혼의 해 질 녘 풍광을 마주하고, 지는 해에 근심을 태워 보낸 것에 감사하며 발길을 돌린다. 
 

대암산 정상에 오른 여행객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기수정 기자]

◆대암산 운석 충돌구에 비친 희망의 해 '황홀'

몹시 추웠던 일몰 나들이의 경험이 발길을 시장으로 이끈다. 든든하게 무장하고 일출 감상에 나서리라 마음 먹고 보온용품 사재기에 나선다. 

이른 새벽, 중무장을 하고 일출 구경에 나선다. 목적지는 대암산이다. 

대암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초계마을은 독특한 이야기를 품었다. 

이 신비로운 이야기의 전말을 알려면 5만년 전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합천 마을에 지름 200m에 달하는 거대한 운석(별똥별)이 '뚝' 하고 떨어졌다. 당시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약 9만배에 달하는 충격이 가해졌단다. 가늠할 수조차 없는 충격이 마을에 가해지면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초토화됐을 것이다. 

운석이 떨어진 충격은 직경 7㎞에 달하는 접시 모양 '초계·적중분지(충돌구)'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우주의 신비를 이곳 마을들이 고스란히 품었다. 

초계면과 적중면은 다른 마을과 사뭇 다른 형태를 갖췄다. 옴폭 파인 접시 안에 담긴 물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를 하고 있다.

운석 충돌구를 세상에 알린 주인공은 초계마을에서 나고 자란 고(故) 임판규씨다. "초계·적중 분지가 운석 충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임판규씨 주장과 한국지질자원연구원(KIGAM) 지질연구센터의 연구가 이 놀라운 신비를 한반도 최초이자 동아시아 두 번째 운석 충돌구라는 '사실'로 밝혀냈다. 

생전에 사비를 모두 털어 이곳이 운석 충돌구라는 것을 밝혀내려 무던히 애를 썼던 임판석씨의 땀방울은 합천한의학박물관 내부에 고인이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과 함께 자료로 남았다. 

접시 모양 분지가 어떤 연유로 생겨났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면서 당시 구석기인들에게 역대급 재앙이었을 운석 충돌구는 이색 운석 여행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지 전문 여행사인 승우여행사 이원근 대표도 이곳에 주목했다. 이곳을 '둘레길'로 만들면 관광상품으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대암산부터 마을(택리 구간)까지 이어지는 길이 있는지 확인하고 둘레길 조성을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2021년 11월부터 2022년 3월까지 5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운석구 안에 있는 작은 마을들 역시 여행 콘텐츠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길을 내기 시작했고, '합천 운석파인(FINE)길'이라는 둘레길 이름도 지었다. 

이후 합천군이 힘을 보태 초계마을 운석 충돌구를 합천의 새 관광자원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합천군은 초계면과 적중면 일대를 '합천 운석 충돌구 지질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지난 8월에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뢰해 관광자원 기초조사와 지질공원 활성화 방안에 대한 용역 보고서를 완성하기도 했다. 

신비한 이야기를 한눈에 담기 위해 대암산 정상(591m)에 오른다. 주변 산들에 비해 야트막한 산이지만 이 산이 더 특별한 이유는 이 독특한 지형을 품었기 때문이리라. 

현재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도 쓰이는 산 정상 오르니 완벽한 타원형 분지 지형이 더 또렷한 모습으로 눈에 담긴다. 서 있는 방향에서 오른쪽, 미타산(662m) 부근에서 희망의 해가 힘차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2022년, 아픔과 상처를 지는 해에 실어 보내니 한결 후련해진 마음 안에 2023년에 대한 기대를 품은 해가 가득 차오른다. 풍광은 황홀하고, 일출을 지켜보는 내 가슴은 황홀하다는 말조차 뱉을 수 없을 만큼 벅차오른다. 

환한 빛이 마을 전체를 밝게 비추니 고즈넉한 마을에 금세 생기가 돈다. 

떠오르는 해를, 햇살 비치는 마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2023년 우리 곁에 올 '검은 토끼의 해'도 우리에게 생기를 선사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바란다. 내년은 모쪼록 모두가 무탈한 해가 되길, 우리 모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귀한' 해가 되길···. 
 

낮에 오른 대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초계·적중 운석 충돌구. 운석이 떨어진 충격으로 직경 7㎞에 달하는 접시 모양 분지가 형성됐다. [사진=기수정 기자]

황매산에서 바라본 일몰. [사진=기수정 기자]

산성으로 향하는 길목. 우뚝 선 나무 한 그루가 저무는 해와 어우러져 낭만을 더한다. [사진=기수정 기자]

 

대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일출. [사진=기수정 기자]

 

황매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본 일몰. [사진=기수정 기자]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대암산. [사진=기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