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책임 실종의 사회
2022-11-10 11:00
김광중 법무법인 한결 변호사
지난해 우리 사회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열풍이 불었다. 여기저기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열기는 식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목소리는 이제 찾기 어렵다.
정부는 2020년 세계적 흐름에 동참하여, 2030년까지 2018년 온실기체 배출량 대비 40%를 감축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주요 선진국 대비 낮은 수준이지만 기후 위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취지로 읽혔다. 그러나 올 들어 정부는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줄여 기존 계획을 후퇴시키는 정책을 발표했다.
연기금은 스튜어드십코드를 제정하는 등 수탁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나섰다. 그에 따라 대표소송 제기 등 적극적 주주권행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올 들어 그런 움직임은 자취를 감추었다. 문제가 된 여러 사안들에서 연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였다는 이야기는 듣기 어렵게 되었다.
레고랜드 조성을 위해 강원도는 강원중도개발공사를 세우고 그 채무 이행을 보증했다. 그랬던 강원도가 강원중도개발공사의 회생신청을 발표했다. 강원도의 보증책임을 믿고 돈을 빌려준 투자자들에게 이것은 보증책임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지방자치단체가 보증을 한 채권도 위험하다는 공포는 순식간에 우리 금융시장을 덮쳤다. 지방자치단체가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공포로부터 다시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50조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흥국생명은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을 연기했다. 관행적으로 첫 번째 콜옵션 행사일에 조기상환이 되어 온 것을 13년 만에 처음으로 금융회사가 조기상환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시장에서 통용된 그 증권 발행자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뒤늦게 예정일에 조기상환을 하기로 하였지만 이미 시장의 신뢰를 잃은 뒤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올 1월부터 시행되었지만 코레일 외에도 곳곳에서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로 인한 사망자 수는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다. 그럼에도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책임을 진 경우는 없다. 아직 처벌된 사례도 없는데 정부는 사업주의 책임을 가볍게 하기 위한 법개정을 시도하겠다고 하였다.
이태원 참사로 수많은 국민이 희생되었다. 그 원인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무책임한 행정에 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대규모 참사 이후에도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리를 고집하고 있다. 기껏 나온 것이 ‘마음의 책임’이라는 궤변이다. 책임의 공간을 대신 채운 것은 고위 공직자들의 농담과 조롱, 비아냥이다. 정체 모를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왔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가히 ‘책임 실종의 사회’라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다. 책임 실종의 사회가 급기야 수많은 국민의 생명마저 빼앗은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 이후의 양상은 책임 실종의 사태가 더 가속화되는 모양새다. 코로나가 사라져 가는 공간에 ‘책임 실종’이라는 새로운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두 사람이 안전하게 함께 옮기기 위해서는 서로가 그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이가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면 자신도 책임을 이행하지 않게 된다. 결국 그 양동이는 금세 엎어지고 만다.
복잡한 사회가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그 책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책임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럼에도 그에 합당한 처벌이 부과되지 않는다면 이내 그것은 다른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준다. 사회 어느 한 곳에서 시작된 그 불온한 기세는 금세 사회 전체에 퍼지고 만다. 한번 그 기세에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 특히 그 무책임의 기세가 우리 사회 정점에서부터 시작된다면 더더욱 빠르고 깊게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책임 실종의 전염병이 사회 정점에서부터 급속하게 퍼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그 결과가 무엇일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