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균 칼럼] 일감 있어도 일꾼이 없는 나라.. 한국 경제 '두뇌.유출' 막아라

2022-11-11 06:00

[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


 
한국 경제가 복합적 위기 국면에 들어섰다. 미국발 기준금리 인상으로 촉발된 전 세계 경기 침체에 한국 경제도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사이에 한국은 미국의 '경제동맹' 청구서까지 받아들면서 ‘핵심 산업 공동화’ 우려마저 생겨나고 있다. 여기에 경제에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정치는 오히려 경제위기를 촉발하는 발화제가 되고 있는 모습이다.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가 정책 전반에 확산되면서 국민 개개인의 삶은 ‘각자도생’에 맡겨지는 한편 국가의 고유 기능인 정치의 실종이 이태원 참사로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김진태발’ 금융 불안은 윤석열 정부의 ‘정치(인) 혐오’에 대한 경제의 ‘보복’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이 신뢰하는 현직 검찰과 검찰 출신 정치인의 중용은 한국 정치를 과거지향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전임 정부 지우기’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오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정치적·정책적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거나 유감을 표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마치 검찰에서 유죄를 자백하는 것처럼 인색하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 책임의 부정은 김진태 도지사가 ‘김진태발’ 금융 불안에 대한 책임자로 전임 지사를 지목하는 억지와 무관하지 않다.

정부 역할의 부정은 당연히 책임 회피로 이어진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하여 인사혁신처가 희생자를 사망자로, 참사를 사고로 변경할 것, 영정사진 붙이지 말 것, 위패를 생략할 것 등을 지시하는 공문을 전국 공공기관에 보낸 것은 정부 책임을 줄여보려는 꼼수이겠지만 유족에 대한 명백한 2차 가해다. 정부의 책임 회피는 재발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과 같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상황에서 ‘정치’가 ‘최후의 보루’로서 취해야 할 기본자세는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모습을 모든 경제주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정부가 시장 뒤에 숨어 책임을 면하려는 모습은 위기 극복을 위한 ‘골든 타임’을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자칫 각자도생의 ‘무정부 상태’로 빠뜨릴 위험이 있다.

한국 경제에서도 인플레이션 억제는 중요한 ‘민생’ 과제로 설정되어 있지만 미국과는 분명 내용에서 차이가 있다. 한국은 코로나19 관련 지원금이 규모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 ‘지역화폐’로 지급되었기 때문에 통화 증발과 같은 인플레이션 부작용은 없었다. 작금의 인플레이션은 주로 에너지, 원자재, 곡물 등의 가격 급등, 공급망 혼란, 환율 상승이 초래하는 수입인플레이션의 성격이 강하다. 외화 유출을 방지하고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금리 인상을 따라가되 경기 침체를 차단하기 위해서 내수를 촉진하는 실질적인 정책 수단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가계의 실질소득을 개선하는 정책은 당면한 경기 침체에 대한 첫 번째 대응책의 핵심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임금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촉진하기보다 물가 상승으로 인한 실질소득의 감소를 보전하여 소비수준을 유지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이것이 ‘민생’이다. 이제 한국 기업도 임금 인상 억제, 노동시간 연장, 열악한 노동 환경에 의존하는 수익성과 경쟁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 조선소들이 베트남 용접공 1150명을 11월 초 입국시키려던 계획이 부실한 선발로 무기한 연기되면서 오히려 선박 인도 지연에 따른 4000억~5000억원의 지체보상금 리스크까지 발생했다. 이들이 설령 계획대로 입국한다 할지라도 한국 용접공만큼 생산성을 내면서 계약 만기까지 조선소에서 일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파격적인 처우 개선 없이 한국 조선산업의 미래는 없다. 이는 반도체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반도체 인재 확보를 위한 국경 없는 전쟁도 이미 가열되고 있다. 한국은 물론 대만, 중국도 이미 수만 명의 반도체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면 국내 반도체 인력을 둘러싼 한·미 간 쟁탈전이 벌어질 전망이다. 산업 입지로서 대한민국을 지키려면 이들 ‘인재’를 위한 처우를 수년 내에 미국 기업 수준으로 개선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인재’가 만연하는 나라에서 ‘인재’에 대해서는 특별한 대우를 해준다는 말속임에 넘어갈 ‘인재’는 없다. 안전하지 못한 장시간 노동이 ‘자유’의 이름으로 사실상 강제되는 나라에서 인명 존중의 의식이 뿌리내릴 수는 없다.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대외 환경의 변화는 미국 패권주의를 뒷받침하는 ‘경제동맹’ 이데올로기의 급부상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제조업의 부흥을 위해 매우 체계적이고 집요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2021년 2월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핵심 광물 등 4대 핵심 품목 공급망을 점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8월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한국산 전기차를 세액공제에서 배제하여 한국에서 ‘뒤통수’ 논란을 불러일으킨 데 이어 같은 달에는 ‘반도체과학법’과 ‘최첨단반도체수출금지령’으로 중국을 견제함과 동시에 자국 반도체산업을 육성할 기준을 마련했다. ‘반도체법’이나 ‘인플레이션감축법’을 집행하면서 철저하게 미국 기업 중심으로 배터리산업과 반도체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9월에 발표된 ‘국가 생명공학 및 바이오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은 한·미 정상이 2021년 5월 ‘미국=기술, 한국=생산’이라는 분업에 합의하면서 맺은 ‘백신 글로벌 파트너십’을 1년여 만에 뒤집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권 교체로 들어선 윤석열 정부가 미처 국정 기조를 확립하기도 전에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의 이례적인 방한과 함께 한·미 동맹의 확장을 의미하는 ‘가치동맹’ ‘기술동맹’ ‘경제동맹’을 제안했다. 미국 권력 서열 1위에 이어 2위(부통령), 3위(하원 의장), 5위(재무장관)가 불과 3~4개월 사이에 방문할 정도로 한국의 역할이 적어도 당분간은 결정적일 것이다. 한국 정부는 먼저 ‘동맹’의 허울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한·미 군사동맹을 연상시키는 ‘동맹’ 개념이 전제하고 있는 한·미 공동의 이익이 ‘경제동맹’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동맹’이 전제하는 중국 견제가 한국 경제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내세우는 ‘경제동맹’의 실제 목표는 미국 핵심 제조업의 재건이므로 한국에는 오히려 손실이 초래될 수 있다. 미국 중심주의는 궁극적으로 한국 핵심 산업의 미국 이전을 가져와 한국 산업의 ‘공동화’로 귀결될 수 있다는 불안이 근거가 없지 않다. 한·미 ‘경제동맹’이 한국의 ‘경제안보’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은 세계시장을 거의 70%까지 장악했던 일본 반도체산업을 불과 10년 만에 몰락으로 이끈 법으로 한국에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또한 한·미 경제 관계에서 경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은 미국에 언약은 의미가 없으며 문서화된 협약, 조약, 계약도 미국의 편의에 따라서 언제든지 폐기되거나 무시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서 현대자동차가 ‘뒤통수’를 맞은 것과 같은 사례가 앞으로도 다시 발생할 수 있다. 미국 주도로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는 실종되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도 사실상 사문화되었으며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무기 도입에서 미국 기업이 의회의 반대를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한국은 이제 미래 산업의 생산거점으로서 입지를 둘러싸고 미국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은 일단 천문학적 정부 지원 및 민간의 자본력과 원천기술, 세계 최대 규모의 시장을 무기로 한국의 반도체와 배터리 기술을 ‘동맹으로 포장하고 국익으로 채우면서’ 반강제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민간기업의 경쟁력은 물론 대미 협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물적·제도적 지원을 보강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하는'(윤석열 대통령) 선을 넘어서 민관이 일체가 되고 필요에 따라서는 미국처럼 정부가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민관 협의를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업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노동을 향해서만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더불어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한국 정부에는 절실하다. 자본과 기술의 이동은 자유로운 조건하에서 중장기적으로 인재가 경쟁우위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미국이 핵심 제조업 부흥을 위해 노동시장 개방을 확대한다면 한국에서는 미국의 “중산층 일자리”(바이든 대통령)를 지향하는 ‘두뇌 유출’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인력 양성만이 아니라 양성된 인력을 유지하고 나아가 해외 인력을 유치할 수 있는 여건이 준비되지 않으면 현재의 조선산업이 미래의 한국 경제의 예고편일 수도 있다. 일터도, 일감도 있는데 일꾼이 없는 나라.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