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휘 칼럼] 英 금융위기의 교훈, 문제는 정치에 있다

2022-10-18 06:00

이왕휘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사진=이왕휘 교수]




 
지난 9월 23일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법인세와 소득세를 내리는 미니 예산안으로 촉발된 영국의 경제위기가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10월 14일 예산안을 주도했던 쿼지 콰텡 재무장관이 38일 만에 경질되었지만, 영국 장기국채 금리와 파운드 환율이 한달 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위기가 빨리 수습되지 않으면 영국은 내년에 세계 경제 5위의 자리를 과거 식민지였던 인도에게 내줄 것으로 예상된다.
9월 6일 취임한 지 두달도 안 되는 짧은 동안에 트러스 내각은 치명적 실수를 연발하며 영국을 경제위기로 몰아넣었다. 재정 적자를 국채 발행으로 조달하겠다는 미니 예산안의 핵심 정책을 폐기하거나 축소하고 재무장관을 교체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 불안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이 위기의 본질이 경제가 아닌 정치에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 때문에 위기의 완전한 종결은 총리의 용퇴를 넘어 정권의 교체를 통해 가능하다는 전망까지 나오는 것이다.
트러스 내각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신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미니 예산안의 핵심이 감세와 규제완화였다는 점에서 트러스 총리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던 마거릿 대처 총리를 모방하였다. 케인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도입된 이 정책은 대내적으로는 스태그플레이션을 해결하고 대외적으로 세계화를 추동하여 약 30년 동안의 장기 성장을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개방과 탈규제가 금융 불안정을 증폭시키고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고조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은 퇴조하기 시작하였다. 영국과 함께 신자유주의를 전 세계에 확산시켰던 미국은 과거 뉴딜과 같이 금융 규제를 강화하고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워싱턴 컨센서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미니 예산안에 대한 국제적 비판에 반영되었다. 내정간섭이란 비판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현직 관료들은 영국의 정책 실패를 지적하였다.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예산안이 시장의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에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도 예산안이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1976년 영국에 구제금융을 제공한 바 있었던 국제통화기금(IMF)은 재정 확대와 양적 긴축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예산안의 철회를 권고하였다.
트러스 내각의 정책결정 과정도 혼란을 증폭시켰다. 콰텡 재무장관은 미니 예산안을 발표하기 전에 이 예산안이 재정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에 대한 예산책임청의 평가를 거부하였다. GDP의 1.5%에 해당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감세안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사전에 막기 위해 독립적 평가를 차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법은 미니 예산안이 정부부채를 증가시킨다는 인식을 강화했다.
재무부 인사도 관료제의 중립성을 무시했다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콰텡 장관은 취임한 지 하루 만에 비정무직으로는 최고 관료인 톰 스칼라 사무차관을 해임하였다. 재무부 관료들을 ‘주산(珠算) 경제학’으로 비판한 트러스 총리가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이 조치는 정책결정 과정의 초당파성을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후임자를 선정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재무부에서 근무한 경력이 전무한 법무부 사무차관을 우선적으로 검토하였다가 부처 내 반발이 진정되지 않자, 콰텡 장관은 재무부 출신의 국제무역부 사무차관을 영입하였다. 이런 조치는 인사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결정적으로 추락시켰다.
마지막으로 재무부와 중앙은행의 정책 협의도 원활하지 않았다. 영란은행은 이달부터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양적 긴축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감세안의 발표 직후 국채를 담보로 하는 부채연계투자(LDI)에 투자한 연기금의 손실이 급증하자 영란은행은 9월 28일 1650억 파운드 규모의 긴급 국채 매입 조치를 발표하였다. 손실을 많이 입은 연기금이 이달 말까지 연장을 요구하였지만, 양적 긴축을 늦출 경우 물가 인하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한 영란은행은 예정대로 10월 14일 매입을 중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재무장관에 취임한 제러미 헌트는 미니 예산안의 전면적 수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기축통화를 보유한 세계 제5위의 경제대국이 정책 실패로 경제·금융·외환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먼저 경제위기에 대비해 거시정책 기조를 재검토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유가 상승으로 과도한 이익을 거두고 있는 석유회사에 횡재세까지 물려 재정을 확충하고 있는 반면, 윤석열 정부는 지난 7월 법인세 감면을 포함한 13조원 규모의 세제개편안을 발표하였다. 영국 사례가 보여주듯이, 경기침체와 수출부진으로 세수가 감소하여 재정건전성이 악화되는 국면에서 감세 정책은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재정적자를 증가시킬 수 있는 조세정책의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와 한국은행 사이의 통화스와프가 금융·외환위기를 막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신화도 빨리 탈피해야 한다. 미국 연준과 무기한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란은행은 파운드의 폭락을 예방하지 못했다. 미국이 허용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통화스와프에 매달리기보다는 우리 정부와 중앙은행이 독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대책에 더 집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기 상황에서 효율적이고 신속한 정책 집행을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낮은 지지율을 가진 지도자가 인기 없는 정책을 추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국 여론조사 기관 유가브(Yougov)에 의하면, 트러스 총리의 2022년 10월 지지율은 부정 71%, 긍정 11%, 잘 모름 19%이다. 총리 취임 전 조사에서 호감도가 21%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취임 후 지지율이 약 10% 이상 하락한 것이다. 지지율이 급상승하지 않는 한 트러스 총리는 사임 압력에 계속 시달릴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직후 52%에서 계속 하향하여 7월 이후 20% 말과 30% 초반 사이에 교착되어 있다. 게다가 현재 여당이 소수당이기 때문에 야당의 협조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으며, 취임 후 5개월이 지났지만 초대 내각이 아직도 완전히 구성되지 않았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정책대응이 지연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정부와 여당은 지지율을 조속히 향상시켜야 할 것이다. 



이왕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외교학과 ▷런던정경대(LSE) 박사 ▷아주대 국제학부 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