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30주년 박승준 스페셜 칼럼] 有利無害 → 同舟共濟 …中의 對韓인식 변화, 행간을 읽어라
2022-08-25 22:02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첸치천(錢其琛·2017년 89세로 사망)이었다. 그는 2003년 10월 베이징(北京)에서 출판된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1985년 4월 덩샤오핑(鄧小平) 동지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한(中韓) 관계의 발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첫째로 장사를 할 수 있어서 경제적으로 좋은 점이 있다(可以做生意 在經濟上好處), 둘째로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끊을 수 있다.”
첸치천의 외교십기는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최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덩샤오핑이 1988년 5월에서 9월 사이에 외국 손님들을 접견하면서 다시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덩샤오핑 동지는 중국 각도에서 보면 중국과 한국의 관계 발전은 유리한 점만 있고 해로운 점은 없다(有利無害)고 말했다. 경제적으로는 쌍방의 발전에 유리하며,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통일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한·중 수교 당시 우리 외무장관은 이상옥(88)이었다. 이 장관은 2002년 12월 서울에서 출판된 회고록 <전환기의 한국 외교>에 수교 당시 우리의 대중(對中)전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91년 11월 첸치천이 중국 외교부장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했다.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제1차 각료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중국에서는 첸치천 외교부장과 리란칭(李嵐淸) 대외경제무역부장이 참석하게 됐다. 노태우 대통령은 첸 부장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국과 중국이 상고시대부터 오천년 동안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으며, 두 나라가 지난 반세기 동안의 관계 단절을 극복하여 국교를 수립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명’이라고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첸 부장에게 400년 전 임진왜란 시 일본의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 정벌을 위하여 길을 열어 달라고 했을 때 조선은 중국과의 의리 때문에 이에 반대하여 큰 인적·물적 희생을 겪었던 일을 상기시켰다고 이상옥 장관은 회고록에 기록했다.
커밍스는 1978년부터 덩샤오핑이 주도하는 경제 발전을 시작할 당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이었던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4개국이 인구 1억9000만명에 GDP 규모 1조6000억 달러 규모였던 반면 중국은 인구 9억6000만여 명에 GDP 규모가 이들 NICS 4개국 대비 13.9%에 불과했다고 분석했다. 세계은행 통계자료에 따르면 1991년 말 현재 한국은 인구 4330만명에 GDP 2952억 달러였고, 중국은 인구 11억5812만명에 GDP 4061억 달러였다. 인구가 중국에 비해 3.7%에 불과한 한국의 GDP가 중국 GDP 대비 72.7% 수준이었다. 3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인구는 지난해 말 현재 5174만명에 GDP 1조8000억 달러이고, 중국은 인구 14억1000만명에 GDP 17조7300억 달러로, 우리가 인구는 중국 대비 3.6%로 30년 전과 비슷하지만 GDP 규모는 30년 전 72.7%에서 10.2%로 낮아져 상대적으로 왜소해졌다.
1950년 6월에서 1953년 7월까지 한반도에서 3년간 열전(熱戰·Hot War)을 치른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중국을 방문해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 화해라는 극적인 행동을 취함으로써 국제정치 질서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닉슨의 계산은 미국과 소련을 양극(兩極·Bipolar)으로 하던 당시 국제정치 구조에 중국을 새로운 중요 축으로 설정함으로써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과 소련 견제를 목적으로 하는 ‘차이나 카드(China Card)’를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닉슨의 그런 계산에 중국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毛澤東)은 한국전쟁 당시 소련과의 동맹을 최우선에 두던 ‘일변도(一邊倒)’ 전략을 바꾸어 중국 외교의 중심을 미국과 유럽, 일본을 한 줄로 세우는 ‘일조선(一條線)’ 협력 전략으로 같은 사회주의권이면서도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던 소련을 고립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중국과 미국은 1979년 1월 1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그 직후인 1월 28일 마오 사후 새로운 권력자 덩샤오핑은 중국 지도자로는 최초로 미국 방문에 나서 미국의 경제원조를 겨냥한 미소 외교를 펼친다. 1992년 8월에 이루어진 한·중 수교는 그렇게 변화한 미·중 관계라는 국제정치 구조의 변화 위에서 성사된 측면이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4일 발표한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축사에서 “세계가 새로운 변혁기에 들어선 시기에 중국과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같은 배를 타고(同舟共濟) 단결 협력해서 위기를 이겨내고 난관을 극복하자”고 제의했다. 시 주석은 “중국과 한국은 좋은 이웃, 좋은 친구, 좋은 동반자이며 나는 중·한 관계 발전을 고도로 중시한다”고 말하고, 양국은 수교 30주년이라는 새로운 기점을 맞아 대세를 파악하고, 간섭을 배제하며, 우호를 다지고, 협력하자”고 촉구했다.
중국 관영 중앙TV는 24일 저녁 전국 연결 네트워크 메인 뉴스에 시진핑 주석의 이 메시지를 톱뉴스로 보도했으며, 시 주석이 이 메시지에서 “한국 대통령에게 대세를 파악하고, 간섭을 배제하며, 우호협력하자”고 말했다는 점을 전체 인민들에게 강조해서 전달한 뜻은 ‘현재 변화하는 국제정세 아래에서 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중국과 우호 협력할 것을 한국에 요구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의 이런 표현은 지난 9일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 부근 지모(卽墨)시의 한 리조트 호텔에서 열린 왕이(王毅) 외교부장과 박진 외교부 장관 간 첫 독대 회담에서 왕이가 강조한 ‘한국이 해야 할 다섯 가지 마땅한 일(五個應當)’과 맥락이 같으며, 윤석열 정부가 바이든 행정부의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는 외교를 펴는 데 대해 경고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왕이가 말한 한국 정부가 해야 할 다섯 가지 마땅한 일은 △이웃 간 우호 견지,△공동 이익 견지 △양국 관계 평등을 존중하고 내정간섭을 하지 말며 △국제사회의 다변(多邊) 주의를 견지하며 △유엔 헌장 정신을 준수할 것 등이었다. 이 가운데 ‘다변주의’는 한국이 한·미 동맹 일변도 외교를 펼치는 것은 곤란하며, 대만 문제에 대해 한국이 언급함으로써 하나의 원칙이라는 중국 내정에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진핑 주석과 왕이 부장 언급을 30년 전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장관과 첸치천 부장이 베이징에서 전 세계를 향해 선포한 ‘한·중 수교 공동성명’과 비교해보면 중국 측 태도가 30년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년 전에 체결된 한·중 수교 공동성명 제2항은 한국과 중국 정부가 유엔 헌장의 원칙과 주권, 영토 보존의 상호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평등과 호혜, 평화공존 등 이른바 중국 정부가 외교에서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보배 같은 칼 ‘평화공존 5원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시진핑 국가주석과 왕이 외교부장 말은 한국 인구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국 인구 대비 3.6%로 비슷하지만 GDP 규모는 한국의 GDP가 중국 대비 72.7%에서 10.2%로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점을 바탕으로 사드(THAAD) 배치와 한·미 동맹 강화라는 한국의 군사와 외교전략 결정에 간섭하려 드는 내정간섭을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점을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30년 전에 수교 공동성명에서 분명히 밝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다짐에 대해 시진핑도 왕이도 한 마디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현 최종현 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 호서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