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제왕학] 아베와 이토 극적인 최후까지 닮은꼴

2022-09-07 11:00
제왕학으로 본 아베시대

[박종렬 논설고문]

1. 요시다, 이토, 아베 좌우명은 ‘지성(至誠)’
2. 이토를 벤치마킹한 아베의 정치 역정
3. 아베와 이토의 7가지 닮은꼴
4. 아베의 극적 최후, 죽을 자리를 얻은 사득기소(死得其所)
 
1. 요시다, 이토, 아베 좌우명은 ‘지성(至誠)’
 
도쿄의 헌정기념관에는 역대 총리들의 좌우명이 걸려 있다. 아베 전 총리 좌우명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같은 ‘지성(至誠)’. 조선 정복이라는 정한론(征韓論)을 펼쳤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좌우명도 지성이었다. 요시다는 맹자의 가르침 중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을 자주 인용해 지성을 다하는 것이 천도(天道)라면서 “각자 뜻을 이루기 위해 지극한 정성을 다해야 한다. ‘성의(誠意)를 다하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고 독려했다. 요시다는 1853년 개국 때부터 58년 이후 구미 열강들과 맺은 통상조약을 포함한 대외 정책과 일본을 독립국으로 보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유수록>, 맹자(孟子)를 연구하여 강의한 내용을 기록한 <강맹차기(講孟箚記)>, <광부의 말씀>, <급무 4조> 등 저술을 통해 나름대로 구국방략(救國方略)을 제시했다.

아베도 정신적 스승인 요시다의 좌우명인 ‘지성(至誠)’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아 재임 중 집요하게 목숨 걸고 ‘평화헌법’ 개헌을 추진했다.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는 중용(中庸)의 ‘지성여신 지성무식(至誠如神 至誠無息)’, 즉 “지극한 정성은 신(神)과 같다. 성지(誠之)는 스스로 이루어 가는 것이요. 그러므로 지성은 쉼이 없다”는 뜻으로 개헌을 위해 매진했다. 개헌을 통해 군사 대국화를 꿈꾸고 극우 행보를 벌인 최장수 총리인 아베의 정치적 성향과 지향점은 100여 년 전 일본 초대 총리가 된 뒤 네 차례 총리를 역임한 아시아 침략의 주범이자 조선 병탄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여러모로 닮았다.

아베는 평소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는 정치인이라고 자주 언급했다.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이토처럼 미국 유학을 했고, 출생지가 야마구치현으로 동향이며 두 사람 모두 정한론을 주창한 요시다 쇼인을 숭배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와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는 야마구치현의 조그만 마을 다부세(田布施) 출신이다. 일본 정가에는 ‘다부세 시스템’이라는 은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가 150년 전에 안배한 권력의 원천, 이토-기시-아베 신조로 이어지는 ‘야마구치 인맥’을 통칭한다. 이토가 총리를 4차례나 역임(1·5·7·10대 내각총리대신)했던 것처럼 아베도 4차례 총리(90·96·97·98대)를 지낸 최장수 총리다. 생애 또한 이토가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것처럼 아베 역시 길거리에서 암살로 마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우리나라, 즉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때리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청일전쟁 당시 총리로 전쟁을 지휘하고 마무리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했던 이토처럼 아베도 ‘한반도’ 문제를 이슈로 삼아 인기를 획득해 총리에 등극했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가?(욕망의 삼각형)”라는 사회인류학자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을 만들 때 얻는 ‘이득’이 가해자를 결집시킨다는 논리로 국내 여론을 조성해 장기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일본의 ‘세습 정치인’ 아베는 2000년 전후 주요 현안으로 떠오른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담화,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침략과 식민 지배를 사죄하고 반성한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담화 등에 대해 강경한 견해를 밝히면서 우익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정치적으로 급성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02년 9월 이뤄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전 총리의 1차 방북 때였다. 당시 관방부 장관으로 동행한 아베 전 총리는 이후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강경 대응을 주문하며 ‘신뢰할 수 있는 우익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쌓기 시작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송환한 아베’로 주가가 오른 그를 2003년 자민당 간사장, 2005년에는 내각 2인자로 불리는 관방장관에 임명했다. 당과 내각의 요직을 모두 거친 그는 2006년 전후 최연소인 52세에 첫 전후 세대 총리가 됐다. 그는 1년여 짧은 1차 집권 시 “전후 체제에서의 탈각”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으나 대장염이라는 지병과 논공행상으로 조각한 ‘도모다치(친구·親舊) 내각’이라는 인사 참사 등으로 단명했다.

5년 뒤 재집권한 아베는 한국을 가상적(假想敵)으로 숱한 망언과 ‘한반도 때리기’로 속죄양 삼는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총리 시절 이토가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부국강병에 전력투구한 것처럼 아베도 일본 재무장 및 군비 증강에 주력하여 군사적 긴장을 유발하며 인기 관리를 했다.

2006년 10월 9일 아베는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동작동 서울현충원을 참배했다. 일본 총독 부임 시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등 애국선열을 모신 이곳에서 그의 참배는 의미가 컸다. 특히 웬만한 한국 드라마는 거의 다 본 것으로 알려진 ‘한류 광팬’으로 소문나 있는 아베 부인 아키에(安倍昭恵) 여사는 드라마 ‘겨울 연가’에 출연했던 박용하(2010년 작고)의 열렬한 팬으로 2005년 9월 한국 방문 때는 부부가 박씨와 함께 골프를 치고 2010년 자살했을 때는 부부가 조문할 정도였다. 1차 내각(2006~2007) 당시만 해도 ‘친한파’로 분류되던 아베는 “한국인들에게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줬다”며 “과거사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처럼 친한(親韓) 기조는 2012년 말 재집권 당시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아베 총리는 ‘과거사 정리와 미래지향적 관계’를 자주 언급했고, 2015년 12월 나온 한·일 위안부 합의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왔던 이 합의는 사실 아베 총리에게도 정치적 리스크가 매우 큰 결단이었다. 아베 지지층인 보수 측에서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냐’는 비난이 나오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로 지지층을 설득했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태와 탄핵으로 한국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위안부 합의는 사실상 파기됐다. 어렵게 만들어낸 합의가 파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자 아베는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이어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하자 결국 지지층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강경한 태도로 돌아섰다. 한국에 대해 “국가 간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며 비난했고, 2019년 7월 수출 규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베는 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중국은 싫은 나라이긴 하지만 외교는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은 협상조차 할 수 없는 어리석은 나라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아베 측근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週刊文春, 2013.11.21. ”한국의 ‘급소’를 찌른다!”). 슈칸문춘은 아베 총리 측근들에게는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새로운 정한론(征韓論)까지 제기되고 있다면서 아베 측근은 이미 한국에 대한 비공식적인 제재 검토에 들어갔다고 밝힌 바 있다.
 
2. 이토를 벤치마킹한 아베의 정치 역정
 
아베의 평소 지론인 ‘아름다운 나라’는 요시다가 가르치고, 이토가 꿈꾸었던 ‘대일본제국’의 다른 표현이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보통국가’로 희석시키고, 자신의 책 제목을 ‘아름다운 나라’로 포장했지만 침략적 팽창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메시지를 통해 끊임없이 발신했다. 아베의 이 같은 정치 행적은 요시다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조선 침략을 주도한 이토와 비슷한 궤적을 보여줬다.

아베가 주변국 반대에도 참배하는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聖所)’는 1868년 이토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區)에 스승인 요시다와 메이지 유신을 이끈 쇼카손주쿠(松下村塾) 동지들을 위해 세운 조슈신사(長州神社·장주는 야마구치의 옛 지명)를 1879년 당시 메이지 일왕이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홈페이지는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다카스기 신사쿠 등 저명한 막말(幕末) 지사, 일청전쟁, 일로전쟁, 만주사변, 태평양전쟁 등에서 국가방위를 위해 돌아가신 신령을 모시고 있다”고 설명한다. 요시다를 조종(祖宗)으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인 아베 외조부를 포함한 14명 등 일본이 주도한 전쟁에서 숨진 246만여 명(1976년 일본국회도서관 <야스쿠니 신사 문제자료집> 1975년 10월 조선인 합사주수·合祀柱數 2만636인, <도쿄신문> 2001년 8월 12일자 보도 조선인 2만1181인)을 신격화해 제사 지내는 공간이다. 지난 세기 침략 전쟁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징인 야스쿠니신사는 일본 최대 규모 신사로 군국주의를 상기시킨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아베는 2차 집권을 시작한 2013년 12월 26일 현직 총리 신분으로 미국과 주변국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이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강한 일본’을 위해선 군대 보유·군비 확대·집단적 자위권 보유 등을, ‘자랑스러운 일본’을 위해선 침략 전쟁을 반성한 역사 교육을 전면 부정하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도 총리 재임 중에는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봄·가을 제사와 8·15패전일(종전기념일)에 공물만 봉납했지만 총리를 사직한 뒤에는 직접 참배했다. 이런 행보는 아베가 추념(追念) 차원이 아닌 일본의 과거사가 ‘침략’ 아닌 ‘진출’임을 신념화한 것으로 요시다의 사상과 철학을 정치 노선으로 따른다는 분명한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3. 아베와 이토의 7가지 닮은꼴
 
2014년 6월 류장융(劉江永) 중국 칭화(淸華)대 교수는 아베의 중국 정책은 이토를 추종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들은 120여 년이란 시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7가지 유사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민족 감정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만행을 저지른’ 이토와 아베의 주된 관심은 한반도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첫째, 청일전쟁(갑오전쟁) 전인 1886년 이토가 조선-중국을 겨냥해 중앙군사지휘기관인 ‘총참모부’를 세운 것처럼, 아베도 2013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출범시켰다.
둘째, 1887년 일본 총참모부가 중국 침략 계획을 세우고 군비 확충과 군함 제조에 나선 것처럼, 아베도 군사비 증액과 무기 수출 금지 조항 완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셋째, 이토가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시행해 일본 교포 보호 명목을 조선과 중국 등 외국 침략의 구실로 내세운 것처럼, 아베도 최근 헌법 해석 수정을 통해 집단 자위권을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와 중국에 손을 뻗치려 하고 있다.
넷째, 이토가 1886년 류큐 제도와 오키나와 등 최전선을 시찰하며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상황에 대한 비밀 조사령을 내린 것처럼, 아베도 지난해 센카쿠와 가까운 이 지역 최전선을 관리·경비 명목으로 둘러봤다.
다섯째, 1886년 청나라 북양 수군이 나가사키에 기항했을 때 수병들과 현지 경찰 간 유혈 충돌 이후 일본에서 반중 분위기가 일어난 것처럼, 2010년 댜오위다오 해역에서 중국 어선과 일본 해상보안청 선박 충돌 후 아베 정부는 반중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여섯째,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영국과 미국 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 중국을 침략한 것처럼, 아베 내각도 최근 적극적인 평화주의를 내세워 미·일 동맹 및 필리핀과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일곱째, 일본이 청일전쟁 전 군사교관을 조선에 파견해 친일파 세력을 키우고 영향력을 강화해 결국 궁중 정변(명성황후 살해)까지 일으킨 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것처럼, 아베 정권도 한·미·일 안보 공조를 내세워 한국에 대한 군사적 침투를 꾀하면서도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범죄자로 모는 등 역사문제에서 끊임없이 한국 국민의 감정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
 
4. 아베의 극적 최후, 죽을 자리를 얻은 사득기소(死得其所)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것처럼 아베 신조도 길거리 유세 중 괴한의 총탄에 삶을 마감했다. 이토가 암살당하자 당시 친구이자 정적(政敵)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마지막까지 운이 좋은 친구’라며 ‘죽을 때 죽어서 죽음이 의의가 있고, 가치가 있을 때 죽을 자리를 잘 얻었다’고 사득기소(死得其所)라며 부러워했다. 와석종신(臥席終身)을 두려워하던 당시 일본 지도층 사무라이들은 “이국(異國)에서 총탄을 맞고 흉사하다니 이 얼마나 멋진 최후인가”라며 ‘사무라이의 최후답다’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당시 ‘퇴물 정치인’으로 치부되던 이토 히로부미 장례는 ‘암살’이라는 드라마틱한 최후로 일본 역사상 최초 국장으로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5000여 명이 조문하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것을 기화(奇貨)로 일제가 조선 병탄을 서둘렀던 것처럼, 아베의 횡사로 이제 일본 헌법 개헌 문제가 가시화되고 있다. 아베의 정치 역정은 오로지 개헌을 통해 일본이 군사 주권을 갖추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탈바꿈하자는 것이었다. 아베의 죽음은 피격 직후 치른 참의원 선거에서 보수층을 결집해 자민당의 압승으로 이어졌고, 일본은 개헌을 통해 ‘아베의 꿈’이었던 군사력을 갖춘 보통나라로 변신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토의 죽음으로 조선 망국(亡國)이 앞당겨진 지난 세기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불길(不吉)한 조짐으로 다가온다.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征韓論)을 정치신념으로 내면화한 아베 같은 일본 지도층이 이어지는 한, 기회가 오면 또다시 일본은 한국과 중국을 향한 침략 근성을 드러낼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구한말 때처럼 일본이 정치적 위기 때마다 한반도 침략으로 난국을 수습하곤 했던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