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국회의장이 워싱턴에 가면 미국 하원의장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미국에서 정치적 비중이 높은 사람이 제 발로 걸어왔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만나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의회에서 연설을 하려면 하원의장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에서 상원의원이나 주지사가 오면 대개 한국 대통령이 만나줬다. 상원의원은 대통령 부통령 예비후보나 다름없으니 소홀히 대접할 수 없는 것이다. 하원 상임위원장이나 아시아·태평양 소위원장 정도가 한국에 와도 대개 대통령이 면담했다.

펠로시 의장은 공항 영접도 받지 못해 미국 대사관에서도 불쾌한 반응이 나왔다. 국회의원들은 의원외교 한다면서 해외에 나가 돈만 쓰지 말고 의장이나 부의장이라도 나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펠로시 의장은 그래서 그랬는지 포토라인이 설치된 숙소인 하얏트 호텔의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들어가 도어스테핑 기자회견을 패싱했다.

윤 대통령은 휴가 중 지방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에 머물러 대학로에서 젊은 배우들과 식사 자리를 가지면서도 펠로시와는 화상통화만 했다. 대통령실은 펠로시 하원의장의 방한 일정이 대통령의 휴가 일정과 겹쳐 대통령 면담이 성사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휴가라는 이유가 너무 한가하게 들린다고 판단했던지 다음 날에는 “‘중국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문의가 많다. 국익을 총체적으로 고려해 결정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은 것은 중국을 고려한 결정이라는 자백 수준의 해명이었다.

펠로시 의장은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도 만났고 일본에 가서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만났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중국 눈치 보느라 한·미동맹을 경시한다는 비판을 국민의힘이 입에 달고 살았다. 한국은 달라이 라마가 방문을 못한 세계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한국이 중국 눈치 보느라 달라이 라마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중국 눈치 보느라 방한한 미 하원의장도 못 만난 것은 세계에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이 중국에 쩔쩔매고 알아서 친중(親中) 한다고 중국이 어여삐 봐주는 것도 아니다. 한국이 미국과 가까워야만 중국을 움직일 수 있는 레버리지(영향력)가 강해진다.

미국 내에도 펠로시의 대만 방문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했다. 하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벌어진 시기에 대만에 꼭 가야 했는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이틀 앞두고 쓴 칼럼에서 “펠로시의 대만 방문은 완전히 무모하고 위험하고 무책임하다”고 썼다. 프리드먼은 “두 개의 초강대국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은 지정학(地政學)의 기초”라면서 “펠로시의 상징적 방문으로 대만의 안보와 경제가 튼튼해지지는 않지만, 핵을 보유한 러시아 중국 두 강대국과 간접적인 전쟁에 뛰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중앙정보국(CIA) 국장, 합참의장 등 국가안보팀도 펠로시에게 대만에 가서는 안되는 이유를 설명했다고 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 “가지 말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중국에 대해 유화정책을 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중간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에 공격할 빌미를 주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중국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은 펠로시의 대만방문 일주일 전 바이든과 전화통화에서 “누구든지 불을 갖고 놀면 불에 델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펠로시가 대만 방문을 강행하자 미국은 7함대 소속 핵 추진 항모인 로널드 레이건함(CVN 76)이 이끄는 항모타격단과 강습상륙함인 트리폴리함(LHA 7), 아메리카함(LHA 6)을 대만해협 인근으로 이동시켰다.

국내외의 비판적 시각을 무릅쓰고 80 노구의 여성이 당차게 대만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중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나가는 중국의 기를 꺾어놓은 것은 의미가 크다. 중국은 펠로시가 한국을 다녀간 뒤 ‘(윤 대통령이 아닌) 김진표 국회의장이 펠로시 의장을 만난 것은 예의 바르게 보이고 국익을 보전하는 조치였다’고 관영 글로벌 타임스를 통해 칭찬했다. 동네 건달이 초등학생을 어르는 것 같다.

대선 기간 중 문재인 정부의 ‘한·미동맹 경시’와 ‘친중 외교’를 강하게 비판했던 윤 대통령은 6월 29일부터 이틀간 스페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나토 정상회의에 한국 정상이 참석한 건 윤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윤 대통령은 마드리드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만나 한·미·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 3각 공조를 강화하는 데 데 뜻을 같이했다.

미국 호주 인도 일본이 회원국인 쿼드 가입도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쿼드 가입 이야기가 쑥 들어갔다. 쿼드 4개국은 동아시아 안보질서를 만드는 주역들이다. 아시아의 중요한 현안이 쿼드에서 논의되는데 중요한 이해당사국인 한국이 중국 눈치 보느라 빠지는 것은 국가의 운명을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해리 해리스 전 주한 미대사는 지난 5월 VOAKorea 인터뷰에서 “한국은 그동안 쿼드 회원이 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기보다는 ‘다른 나라로부터 가입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며 애써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려 했다”고 분석했다.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이 최순실 국정농단이 터졌던 박근혜 정부 때보다 더 낮은 24%를 기록했다. 공청회 한번 안하고 교육부 정책으로 튀어나왔던 ‘초등학교 입학연령 만5세 하향’도 인사 부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육부 장관 차관, 차관보에 교육전문가가 한명도 없어 이런 초보 실수가 걸러지지 않았다. 이번 펠로시 패싱을 보면 외교팀도 탄탄해 보이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인사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