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인사이드] 범죄 목적 '투자와 횡령' 보호해야 하나...'위탁관계' 쟁점

2022-07-21 06:00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요양병원 설립 자격이 없는 자가 운영 수익을 나눠 갖기로 약속하고 투자금을 모은 뒤 개인적인 용도로 써버렸더라도 횡령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돈 보관의 목적이 범죄의 준비와 실행을 위한 것이라면 횡령죄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조계에서는 법원이 법에 어긋나는 일을 위해 재산을 주는 이른바 '불법원인급여'에 조력을 다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다만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반환 청구를 시도해볼 수 있다는 취지로 내린 전향적 판결이라고 평가한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횡령 혐의로 기소된 A씨(51)의 상고심에서 징역 6월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A씨는 2013년 1월 피해자 2명과 함께 의료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 요양병원을 운영하기로 약정하고, 두 사람에게서 각각 투자금 2억2000만원과 3000만원 총 2억5000만원을 받았다.

현행법상 의료인이 아닌 사람들도 의료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지만, 의료기관을 세우는 건 의료인이어야만 한다. 이들의 행위는 불법인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은 의료기관 설립 과정에서 갈등을 빚었고, A씨는 투자금을 두 사람에게 돌려주지 않고 개인 빚을 갚는 데 2억3000만원을 사용했다.

1·2심은 A씨의 횡령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6월을 선고했다. 요양병원 설립과 운영은 A씨와 두 피해자들의 공동사업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횡령죄 무죄 이유...대법 "가치 있는 신임 관계 아냐"
대법원은 그러나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A씨와 두 투자 피해자들 사이의 관계가 법적으로 보호할 만한 위탁관계가 아니라는 취지다.

횡령죄가 성립하려면 재물의 보관자와 소유자 사이에 위탁관계가 존재해야 하고, 위탁관계는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신임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기존 대법원 판례다.

위탁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재물의 보관자와 소유자 사이의 관계, 재물을 보관하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법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는지 등을 고려해 판단한다.

예를 들어 회사 대표이사로 근무하는 사람은 회사의 자금을 보관하는 위탁관계가 있기 때문에 회사의 자금을 빼돌리면 업무상 횡령죄가 성립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러나 이번 재판에서 대법원은 원고와 피고 사이 위탁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횡령죄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원은 "규범적 관점에서 볼 때 범죄의 실행이나 준비 행위를 통해 형성된 위탁관계는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가치 있는 신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구체적으로 "(투자금은) 의료기관을 개설할 자격이 없는 자의 의료기관 개설·운영이라는 범죄의 실현을 위해 교부됐으므로 A씨와 투자자 사이에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신임에 의한 위탁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번 사건에서 금원의 교부가 의료법 위반 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가 민사상 반환 청구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사상 반환 청구권이 허용된다고 해서 무조건 형사상 보호 가치가 있는 위탁관계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민사적 소송은 가능함을 시사했다.

법조계에서는 법원이 불법적인 행위에 조력을 다해주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서정 변호사(법률사무소 홈즈)는 "횡령의 보호범위를 보호할 만한 신임에 의한 위탁관계로 한정한 것에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통상 업무상 횡령죄의 구성요건상 타인의 사무처리를 위탁받은 임무 위임관계가 있을 것을 요한다"며 "이번 판결로 기계적인 신임 관계 여부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임 관계, 즉 임무 위탁관계가 형법상 보호받는 관계일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판례가 정리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민사적 소송은 된다고?...'전향적 판결'인 이유
원칙적으로 불법적인 원인을 이유로 돈을 지급한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 이를 '불법원인급여'라고 한다. 민법 제746조는 '불법의 원인으로 인해 재산을 급여하거나 노무를 제공한 때에는 그 이익의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불법 도박자금을 빌려주거나 성매매 매춘료를 빌려주는 경우, 뇌물로 전달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돈을 수령하는 경우 등은 법적으로 돌려받지 못한다.
 
이에 따라 법원은 주로 민사상 반환청구가 불가능한 경우, 즉 불법원인급여에 해당하는 경우여야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해왔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불법원인급여지만 민사상 반환의무는 질 수도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김의택 변호사(법무법인 성지파트너스)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불법원인급여가 아닌 경우지만 횡령죄로 보호할 만한 위탁관계가 인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횡령죄를 부정했는 바, 이는 재산범죄의 비범죄화 경향에 따른 판시"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주류 판결에 대해 불법원인급여로 인정되면 범죄자가 민사상 반환의무도 면하면서 동시에 횡령죄도 무죄가 되는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는 전향적 판결"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