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손해사정 언제까지?] 금융당국, 제도개선안 1년째 '오리무중'

2022-06-08 18:00
금융위, 지난해 5월 '셀프 손해사정' 방지 제도 마련했지만 국회 문턱 못넘어
주요 보험사들, 손해사정 업무 50~90% 자회사에 맡겨

# 경기도 구리시에 사는 김모씨는 보험사로부터 자동차 사고로 인한 보험금을 모두 받지 못했다. 김씨는 지난해 음주운전 차량이 김씨의 차량을 들이받아 3주 넘게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해당 보험사는 손해사정사의 의료자문 후 상대 차량 운전자의 음주측정 결과를 확인하기 어렵다며 약관에 명시된 보험금의 70% 정도만 지급했다.

# 작년부터 시야가 흐려지고 뿌옇게 보이는 등 눈에 불편한 증상이 있던 이모씨는 한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이씨는 A 보험사에 실손 보험금을 청구했다. 하지만 해당 보험사로부터 최근 필수 조건으로 추가된 세극등현미경 검사지가 없으면 보험금을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처럼 자동차보험과 실손의료보험 등 금융당국과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 기준을 강화하면서, 보험사들의 보험금 지급 거부 민원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보험사들은 의료자문을 맡는 손해사정법인을 두고 보험가입자가 아닌 보험사에 유리한 손해사정 업무를 하는 이른바 '셀프 손해사정'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5월 보험사의 '셀프 손해사정'을 막기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섰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해당 대책이 1년째 표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주요 보험사 자회사 손해사정법인에 일감 몰아줘
8일 삼성생명·교보생명·한화생명·삼성화재·현대해상·DB손해보험 등 주요 생명·손해보험사들의 공시를 분석한 결과 이들 보험사는 지난해 전체 손해정액의 50~90%를 자회사 손해사정 법인에 몰아준 것으로 나타났다.

보험사별로 보면 삼성생명은 지난해 자회사인 삼성생명서비스손해사정에 1023억원의 수수료를 지급했다. 삼성생명의 전체 손해사정 수수료 중 삼성생명서비스손해사정에 위탁된 비율은 89.8%에 달했다. 한화생명은 전체 손해사정 위탁 건수 중 99.8%를 자회사인 한화손해사정에 맡겼다. 한화손해사정이 한화생명으로부터 받은 수수료는 348억원이다.

이 밖에 삼성화재는 삼성화재서비스손해사정과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에 대한 위탁 비율이 각각 19.7%, 35.8%였다. 현대해상과 DB손해보험이 각각 자회사 손해사정 법인에 위탁한 비율이 50% 안팎을 기록했다.

손해사정은 보험사 서류 심사만으로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 제3의 전문기관이 손해액을 산정해 보상금 지급 여부와 규모를 결정하는 조사업무를 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험사가 자회사로 손해사정법인을 설립해 일감을 몰아주고 있는 실정이다. 보험사의 자회사이다보니 손해사정법인은 보험사에 유리한 결과를 도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보험금 지급과 관련한 보험 가입자의 보험금 불만족도 역시 급증하고 있다. 2017년 0.4 수준이던 생명보험사의 평균 보험금 불만족도는 지난 2020년 0.5까지 상승했다. 같은 기간 손해보험사의 평균 보험금 불만족도 역시 0.13에서 0.15로 상승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대형 보험사들의 셀프 손해사정 관행이 지속되면서, 손해사정 업무의 공정성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며 "특히 과잉진료 문제가 본격화된 자동차보험과 실손보험과 관련한 손해사정 시 이들 자회사형 손해사정법인들이 보험사에 유리한 판정을 내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를 막기 위해 금융당국이 지난해 셀프 손해사정 방지제도 마련에 나섰지만, 여전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료=국민의힘 강민국 의원실]

셀프 손해사정 막겠다는 당국 1년째 시행 못해
금융당국이 지난해 제도 개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지만, 반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5월 보험사의 셀프 손해사정을 막는 제도 개선방안을 내놨다.

금융위가 내놓은 개선방안에는 손해사정 업무를 위탁할 때, 자회사에 몰아주지 못하도록 하고 보험금 삭감을 유도하는 성과지표 사용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먼저, 금융위가 만든 개선방안에는 보험사가 손해사정 업무를 위탁할 때 지켜야 할 세부 기준과 절차 마련을 의무화했다. 특히 위탁건수의 50% 이상을 자회사에 위탁할 경우 선정·평가 결과 등을 이사회 보고 후 공시하도록 했다.

또 보험사가 보험금 삭감을 유도하는 항목을 내부 고용과 위탁 손해사정사의 성과지표로 사용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보험금의 삭감규모·비율, 손해율 등과 관련한 고정된 목표비율을 제시하면서 목표 달성도를 급여나 위탁수수료, 위탁물량 등에 반영하는 행위도 엄격히 제한한다.

소비자가 직접 손해사정사를 선임하는 '독립손해사정사'를 활성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이를 위해 보험사가 소비자에게 보험금 청구 시 독립손해사정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점과 이 경우 발생하는 비용은 보험사가 부담한다는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도록 했다. 또 독립손해사정사 선임을 위한 '보험사의 동의기준'을 명확히 설명하고, 소비자가 해당 기준을 충족한 독립손해사정사 선임을 원할 경우 보험사는 이를 최대한 보장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보험업법 개정안은 1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보험사들의 반발이 거세자, 금융위는 지난해 말 감독규정 개정을 통해 손해사정사회가 표준 업무기준을 마련해 손해사정업자에 권고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또 손해사정사 100인 이상의 대형 손해사정업자에 대해서는 세부 업무기준·요건 등을 시행세칙을 통해 적용하기로 했다. 이마저도 손해사정사회의 늑장 대응으로 제도 시행 시기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대선과 지방선거 등으로 국회에서 관련 법안 통과가 계속 지연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보험사에서도 이를 반기지 않고 있고, 손해사정사회도 제도 도입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금융당국이 백내장수술과 관련한 실손보험과 자동차보험의 보험사기 근절을 내세우면서 보험금 지급기준을 강화한 것도 사실상 보험가입자의 보험금 지급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며 "손해사정 문제를 해소하지 않고 보험금 지급절차만 강화할 경우 향후 관련 민원이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