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고물가 비명] "슬로플레이션 못 잡으면 더 큰 위기 온다"...태풍 속 韓경제

2022-06-07 18:00
소비자물가 연내 6%대 돌파할 수도
정부 물가 대책 실효성·체감 '글쎄'

지난 6월 3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계산대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국 경제가 태풍 권역에 진입했다. 브레이크 없는 물가 상승에 서민들의 비명이 커지고 있다. 경기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저성장과 고물가가 동시에 나타나는 '슬로플레이션(Slowflation)' 국면에 이미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대로 가다가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물가 상승을 동반한 경기침체)'에 진입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짙다.
 
"더 오른다고?"...5%대 물가 6%대로 껑충 뛰나
물가가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심상치 않던 물가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푸념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07.56(2020=100)으로 작년 같은 달보다 5.4% 상승했다. 2008년 8월(5.6%) 이후 13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공급자 측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가공식품 물가는 10년 4개월 만에 가장 크게 뛰었다. 곡물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한 탓이다. 밥상 물가도 비상이다. 국수는 1년 전보다 33.2%, 밀가루는 26%, 식용유는 22.7%나 뛰었다. 지난달 안정세를 보였던 농·축·수산물 물가도 축산물(12.1%)과 수산물(2.7%)을 중심으로 4.2% 올랐다.

반면 경기는 점차 하강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현재와 앞으로의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경제지표는 최근 2개월 연속 동반 하락했다. 통계청은 통상적으로 동행지수 순환변동치가 6개월 연속 하락하면 경기가 하강 국면에 진입한 것으로 판단한다. 

지난달 말 통계청이 발표한 '4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면 현재 경기를 나타내는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102.1로 한 달 전보다 0.3포인트 내렸다. 지난 3월에 이어 두 달 연속 하락했다. 향후 경기 흐름을 나타내는 지표도 뒷걸음질쳤다. 지난달 선행지수 순환변동치는 99.3으로 0.3포인트 하락하면서 10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상황이 이러자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1%에서 2%대 후반으로 하향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달 중으로 발표될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에 이런 내용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당분간 고물가 상황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경제성장률 전망치까지 하향 조정되면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저성장-고물가 함정에 빠진 한국 경제' 보고서를 통해 올해 하반기(7~12월)에 한국 경제가 저성장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경연은 보고서에서 "수입 물가를 통한 공급 측 물가 상승 압력이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있다"며 물가 상승률 고점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올해 하반기 물가가 6%까지 오를 수 있다는 어두운 전망도 나온다. 6%대로 올라서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기로에 선 韓경제...스태그플레이션 진입 목전 
전문가들은 지금 한국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같은 장기 침체에 빠지느냐, 마느냐"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경고한다. 작금의 상황이 계속되면 경기 불황 속에서 물가는 계속해서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빠르게 치솟는 물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임금 인상으로 연결되고, 스태그플레이션을 본격화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가 고공행진이 계속되면 기업의 임금 인상을 부추기고, 기업 비용으로 이어져 물가를 더욱 자극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미 우리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했다고 일침을 날렸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달 한국경제연구원이 전국경제인연합회 콘퍼런스센터에서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해 "한국은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결합한 스태그플레이션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노동시장 경직성과 금리 인상, 유동성 회수 등 긴축적 통화 정책, 추가경정예산(추경) 등 재정지출 확대 등의 영향으로 상황이 더 악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역시 이미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했거나 올해 하반기에 진입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한국 경제는 수년간 다른 주요국에 비해 성장률이 낮았고 최근에는 물가마저 급등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되는 큰 위기에 처해 있다"고 꼬집었다. 
 
정부 대책 줄줄이 '실패'..."체감효과 크지 않아"
문제는 물가 오름세를 제어할 뾰족한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정부가 대대적인 물가 안정 대책을 발표했지만, 치솟는 물가를 얼마나 잠재워줄지 미지수다. 

정부는 앞서 수입 돼지고기나 밀가루 등 14대 품목의 관세를 없애는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미국 등 주요 수입국들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국가인 만큼 기존에도 관세가 없거나 높지 않아 체감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1인당 1만원 한도에서 최대 20%까지 할인받을 수 있는 농·축·수산물 할인쿠폰도 당초 예상보다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이미 물가가 전반적으로 많이 오른 상황에서 1만원 한도 내에서 이뤄지는 할인으로는 큰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이전 정부에서도 숱하게 많은 특단의 대책을 내놓으며 총력전을 펼쳤지만, 물가 고공행진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말 김밥, 햄버거, 피자, 치킨 등 12개 외식 품목의 프랜차이즈 업체 가격과 등락률을 매주 공개했다. 소비자에게 알맞은 가격 정보를 제공하고, 업체 간 가격 경쟁을 유도해 물가 안정을 꾀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큰 효과를 내지 못하면서 '탁상공론'이라는 비판과 함께 시행 석 달 만에 폐지됐다.

이명박 정부 초기 만들어진 'MB물가지수'도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글로벌 인플레이션 압박에 시달렸다. 고물가를 잠재워야겠다는 생각에 쌀, 밀가루, 라면 등 서민 생활과 밀접한 52개 품목을 관리 대상으로 정하고 해당 품목의 지수 평균을 공개했다.

심지어 농산물을 비롯한 주요 생필품에 대해 책임자를 지정해 관리하게 하는 '물가안정책임제'도 도입했다. 일명 '배추 과장'이나 '쌀 국장' 등 품목마다 책임자를 정해놓고 이들이 해당 품목의 물가상승의 요인을 점검해 수급 안정 대책을 추진하도록 했다.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MB물가 5년간 상승률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1.6배에 달했다. 정부의 인위적인 물가 관리가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당시 통계청이 내놓은 분석자료를 보면 2008년 2월부터 2013년 2월까지 MB물가는 5년간 25.8% 상승했다. 연평균 5% 이상 오른 셈이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481개 상품·서비스)는 16.5% 오르는 데 그쳤다.
 
어깨 무거워진 중앙은행...'금리 인상' 속도 내나
정부의 물가 대책이 매번 실패하자 일각에서는 중앙은행의 역할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결국 금리 인상을 통해 시중에 풀린 유동성을 회수해야만 물가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취임 이후 성장 둔화보다 물가 상승이 더 우려된다며 물가 문제를 거론했다. 이 총재는 취임 후 첫 금융통화위원회 기준금리 결정 회의에서 "지금과 같은 높은 물가 오름세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당분간 물가에 보다 중점을 두고 통화정책을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금리를 올리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무작정 금리만 올리면 한·미 금리가 역전돼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고 원화 가치가 추가로 하락할 수 있다. 성 교수 역시 '속도 조절론'을 강조했다. 그는 "금리 인상 폭이 지나치게 크면 경제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면서 "인상 폭이 크지는 않되 점진적이고 지속해서 금리를 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