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콘텐츠] 법이 소녀를 못 지키면…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
2022-05-20 14:59
궁지에 몰린 '외톨이 늑대'는 통제불능 상태가 된다
'잃을 것 없는 자들의 저항'을 담은 영화
'잃을 것 없는 자들의 저항'을 담은 영화
◆왜 스무 살 구혜영은 불도저에 타게 됐는가?
영화가 시작된다. 가녀린 소녀가 학교 앞을 서성인다. 작은 체구지만 표정은 심상치 않다. 세 명의 일진 여학생을 보자마자 달려들고 한바탕 육탄전을 치른다. 수적 열세에 몰리자 소녀는 용 문신이 가득한 팔로 날카로운 가위를 휘두른다. 두려움에 멈칫한 일진들에게 경고하고 소녀는 자리를 뜬다. '불도저에 탄 소녀'는 시작부터 끝까지 소녀 구혜영 역을 맡은 김혜윤 배우('SKY 캐슬', '어쩌다 발견한 하루' 출연)가 폭주하는 영화다. 마치 주위에서 억지로 제지하면 화병으로 제명에 못 살 것처럼.
구혜영이 일진들과 붙은 건 나름의 의협심으로 약자를 돕다 일어난 시비로 확인된다. 하지만 현행법상 엄연히 폭행이다. 징벌의 일환으로 직업교육 수강이 진행된다. 그녀가 신청한 수업은 중장비 과목이다. ‘예쁘지도’, ‘싹싹하지도’ 않은 구혜영은 강사에게도 기피 대상이다. 강사와 다른 수강생들은 '저래서 시집이나 가겠느냐'며 성차별적인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중장비 운전에 소질이 있다.
이렇듯 영화 초반의 주인공은 대책 없는 문제아에 가깝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에 사라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내고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자 구혜영의 일상은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석연찮은 구석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친척들은 뭔가 아는 눈치인데도 나서기는커녕, 좋게 넘어가라고 종용한다.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회장은 사람 좋은 척 설명을 해주지만 의심은 커진다. 마침내 사태의 진상을 파악한 구혜영, 하지만 세상 누구도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지 않는다. 경찰도, 친척도 모두 강자의 편을 들고 고분고분하면 회장이 선처해줄 것이라 달랜다.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난 주인공은 결국 불도저에 오른다.
'불도저에 탄 소녀'는 실제 중장비로 관공서를 들이받은 사람들 일화에 착안한 이야기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이웅 감독은 "사실 시나리오를 쓴 다음에 그런 실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됐다"며 "나름 창의적으로 썼던 시나리오였는데 실제 있는 일이라 해서 당황했고, 사례를 찾아보니 더 당위성이 생겨 힘내서 썼다"라고 말하며 세간에 알려진 영화의 기원을 정정하기도 했다.
감독은 중장비라는 소재의 힌트는 자신이 대학시절 겪은 농민투쟁이라 밝혔다. 그곳에 연대하러 갔더니 농민들이 분노에 차서 농기구를 고속도로에 끌고 올라온 장면이 뇌리에 박혔고 누구도 못 막겠다는 생각이 영화의 시작점이라 했다.
감독이 밝힌 ‘진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2004년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미국에서 발생한 '킬도저' 사건을 영화와 연결시켰다. 2004년 6월 4일,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용접기술자 겸 자동차 머플러 수리기사인 마빈 히메이어가 개조한 불도저를 몰고 인근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부순 사건이다.
해당 사건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건 그저 ‘기행’으로 그치지 않는 사연을 품었기 때문이다. 2001년 자동차 머플러 가게를 운영하던 마빈은 가게 인근에 대규모 시멘트 공장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공장 부지는 가게 입구 주 통로였기에 마빈은 대안을 마련해 달라고 공장과 시청에 요청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내쫓기는 상황에 직면한다.
공장주는 시의회를 통해 가게를 빙 둘러 포위하는 형태로 공장 부지를 확정했고, 마빈 히메이어는 마을 회의에 해결을 요청했다. 하지만 지역 언론이 그를 비난하면서 마빈은 애인과 헤어졌고 부친이 세상을 떠난다. 시의회는 트집을 잡아 벌금을 부과한다. 궁지에 몰린 마빈은 시청에 탄원서도 내고 대안 마련을 위한 시간을 달라 호소했으나 끝내 그의 요청은 거부당한다. 결국 ‘잃을 게 없는’ 지경에 몰린 마빈은 2년간 불도저를 개조해 탱크에 버금가는 중장갑과 무장을 갖추고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사건 당일 2시간여에 걸쳐 범인은 ‘킬도저’를 몰고 자신의 가게, 시멘트 공장은 물론 시청, 경찰서, 신문사, 판사의 집 등 원한 맺힌 이해당사자의 건물을 말 그대로 ‘밀어버렸다'. 13채의 건물이 파손되고 700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났지만, 지인과 시민들에게 미리 대피하라 알렸기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주 방위군 아파치 공격헬기와 재블린 대전차미사일까지 출동했지만, 결국 상황은 구렁에 빠져 기동 불능이 된 킬도저 안에서 마빈이 자살하는 것으로 끝났다. 애초 탑승 후 밀폐 상태로 하차가 불가능한 구조였다. 범인이 자살한 데다 전 재산을 킬도저 제작에 쏟았기에 피해보상은 불가능했다.
‘킬도저’ 사건은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고 그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2014년 칸영화제 각본상 등 수십 개의 영화상을 수상한 안드레이 즈비아진세프 감독의 영화 '리바이어던'은 해당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리바이어던'은 러시아 지방도시에서 권력자의 별장부지 명목으로 졸지에 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가장이 자신의 총과 용기로 저항하다 정경유착에 의해 패배하는 말로를 담은 영화다. 공권력이 공정을 잃고 힘 있는 자의 편을 들 때 서민이 느끼는 열패감이 잔인할 정도로 실감나게 담겨 있다. 푸틴 치하 러시아의 실상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평가다.
이런 ‘잃을 것 없는 자들의 저항’을 다룬 영화는 21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중이다. 2013년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중국의 거장 지아장커가 만든 '천주정'에서도 이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소도시에서 동네 친구였던 기업가가 마을을 좌지우지하는 데 반대하던 주인공이 따돌림을 당하고 누명을 쓴 채 배제되는 과정에서 끝내 총을 들고 대량학살을 벌이는 과정이 생생하게 재현된다. 경제가 성장해도 민주주의와 공정한 사법행정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협이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게 영화들로 증명되는 셈이다.
사법제도는 여전히 서민들에겐 두렵고 난해한 대상이다. '불도저에 탄 소녀' 속 20살 소녀 구혜영이 영화 속에서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라는 평가도 나올 법하다. 하지만 고립무원 상태에서 자신이 가진 걸 송두리째 빼앗길 위기에 처한 주인공에게 영화 속 경찰과 이웃들이 아무 도움도 주지 않을 때 약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극단화된, ‘잃을 것 없는 개인’이 외톨이 늑대로 변신하는 순간 사회적 비용과 후유증은 통제불능 상태로 치닫기 마련이다.
사법제도가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공정한 기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전문가의 기술적 영역으로만 흐를 때 닥칠 위험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참고할 만한 영화다.
[작품 정보]
불도저에 탄 소녀 The Girl on a Bulldozer
2021|한국|드라마
2022년 4월 7일 개봉|112분|15세 관람가
감독 박이웅
주연 김혜윤(구혜영 역), 박혁권(구본진 역), 오만석(최영환 역)
출연 박시우(구혜적 역), 한혜지(경원/한국손해보험[목소리] 역), 예성(고유석 경위 역)
제작 고집스튜디오
배급 트윈플러스파트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