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당선인에 바란다 - 4강 외교 이렇게] ④ 유럽·러시아

2022-05-04 05:00
'가치외교'와 ''실리외교'에서 균형점 찾아라

                  
<편집자 주> 아주경제신문은 오는 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새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뜻에서 ‘윤석열 당선인에게 바란다 - 4강 외교 이렇게’라는 시리즈 칼럼을 마련했다. 시리즈 칼럼은 ① 중국편 박승준 논설고문 ② 미국·북한 편 안인해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③일본편 신각수 전 주일대사 ④ 유럽·러시아편 이희수 한양대 명예교수 순서로 연재한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우리 외교의 근본적인 전략 지형 흔들려
 
미·중 갈등이 심화되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글로벌 격변기에 출범하는 차기 정부의 외교 정책과 방향이 큰 관심사다. 외교·안보 분야를 책임질 장관이나 대통령실 주요 인사들이 발탁되고 이미 상당 부분 대외 활동을 시작한 시점에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다가온다. 그동안 실질적 남북 협력 관계 구축, 북·미 대화를 통한 비핵화 목표에 전념했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차기 정부가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소원했던 양국 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란 생각이다. 문제는 대미 외교에 치중한 나머지 한·중·일 관계 정립은 물론 유럽, 러시아, 중동 등 다른 중요한 지역과 협력 방향이나 외교 정책이 아직은 와닿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년 9월 한국과 러시아는 수교 32주년을 맞는다. 러시아와의 외교 정상화로 귀결된 우리 북방외교는 북한에 대한 외교·안보적 우위를 확보하면서 실용적인 통일 방안을 중심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보다 진취적인 접근을 가능케 해주었다. 그 후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2006년 뮌헨 안보회의를 기점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유럽 내 공세적 확장을 경계하고, 미국의 전략·전술 미사일 배치에 강력하게 반발해 왔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을 협력의 지렛대로 삼아 상하이협력기구(SCO)를 결성하였고, 과거 피지배 국가였던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다자관계를 복원하면서 유라시아 경제공동체(EurAsEC),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를 설립하였다. 2015년부터는 매년 동북아시아 국가 정상들과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동방경제포럼’을 개최하면서 신동방정책을 야심 차게 추진해 나갔다. 이어 유라시아경제연합(EEU)을 출범시켜 중국의 일대일로(BRI)와 협력적 시너지를 모색하고 있다. 미·중 경쟁이 가속화된 이후 러시아의 위상을 극대화하려는 푸틴의 패권적 유라시아주의의 행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은 러시아와 협력해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또 다른 채널을 가동해 왔다. 향후 극동 시베리아 개발 과정에서 한국의 자본, 기술, 개발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 공간도 준비해 왔다. 특히 미·중 전략 경쟁 구도에서 러시아는 한·러·일 중간국 연대를 통한 소다자주의 구축의 중추국으로 한국 외교에 의미 있는 전략적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신북방 경제협력 추진을 통해 유라시아로 진출하려던 우리 외교의 근본적인 전략 지형을 흔들고 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혀 다른 전략적 함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선과 악 두 세력 간 싸움이 아니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자유 진영 국가들의 필연적 승리를 담보하는 전쟁도 아니다. 러시아 시각에서 보면 NATO의 지속된 동진이 힘의 균형을 깨뜨리게 되었고, 러시아 동맹축의 근간이었던 우크라이나마저 NATO 일원으로 자국에 직접적인 안보 위협이 되는 상황을 방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EU가 NATO 확장 정책을 통해 평화 체제의 근간을 뒤흔든 현상 파괴 세력으로 본 것이다. 러시아를 이웃 주권국가를 무차별 공격하는 침략국으로 단정하는 서방 언론과는 상당한 온도차를 보인다.
 
포기할 수 없는 국익 차원 경제협력은 확보해야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가치 외교 공유와 경제적 실리 외교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독자 제재나 군사 지원 대신 서방의 ‘전략물자 수출통제’에 동참해 한·미 동맹과 한·러 관계 사이에 균형점을 찾는 것이 최상일 것이다. 이는 향후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경제적 교류를 지속해 나가고, 신북방정책으로 연결된 유라시아 에너지 벨트 구축, 유라시아 경제연합 참여 등과 같은 포기할 수 없는 국익 차원의 실질 협력을 담보하는 길일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와 유럽 관계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다. 러시아의 확장 정책에 위협을 느낀 독일이 국방 예산을 두 배로 증액하면서 새로운 군사강국으로 발돋움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고, 핀란드와 스웨덴 같은 나라들조차 NATO 가입을 서두르고 있다. EU는 1962년 이후 누적 통계로 1228억 달러에 달하는 우리의 최대 투자국이다. 2010년 FTA 협정을 체결한 후 가장 중요한 교역 파트너가 되었고, 2016년에는 EU의 해적 소탕 작전에 청해부대를 파견함으로써 글로벌 이슈에도 협력하는 성과를 보였다. 따라서 중요한 교역 상대국으로서 러시아·유럽 사이에서도 우리는 EU와 민주, 자유무역, 인권, 법치라는 글로벌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러시아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평화 중재자로서 역할을 부각하는 정교한 외교전략 마련이 시급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싸고 적나라하게 표출된 중동 사회의 이해구도도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전통적인 친러 국가인 시리아와 이란이 러시아의 침공 명분에 동조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동안 경제와 안보 협력에서 친서방 노선을 보였던 아랍 강국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조차 러시아를 편들고 있다. 세계 최대 에너지 패권 국가인 미국에 맞서 러시아와 함께 OPEC⁺ 협력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중동 산유국들이 최대 고객인 중국과 이익 동반자인 러시아를 등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마저 미국의 러시아 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엄중한 자국 이익 우선주의 환경에서 미·중·일·유럽·러 관계의 고차방정식을 풀어나갈 최고 역량을 가진 통찰력 있는 외교 전문가를 육성해 나감과 동시에 가장 적확한 인재를 발탁하는 외교 인재풀 관리제도의 구축이 중요하다. 나아가 현지 문화와 언어에 능통한 지역별 전문 외교관을 길러내고 그들이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외교문화 조성도 따라야 한다.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을 러시아 문화권인 CIS로 묶어 러시아 전공자들이 그 지역 대사나 외교관으로 파견되는 것이 상례였다면 이것도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2004년 이라크 전쟁 과정에서 전쟁 무풍지대였던 비아랍어권 쿠르드 지역에 자이툰 부대를 파병하면서 이라크 전후 복구 명분을 내세우며 아랍어 통역자들을 파견하던 아마추어 외교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한류와 스마트 첨단 제품 생산국으로서 세계 최고 수준의 ‘KOREA’ 브랜드 가치와 선호도라는 높아진 국격에 맞게 글로벌 공여 시스템을 대폭 확대해 나가야 한다. 기후위기나 탄소중립, 우주산업의 공동 개발 같은 글로벌 어젠다 주도는 물론 전쟁 난민 보호, 팬데믹 원조, 분쟁 지역에서 평화 메신저 역할 강화, 인류 문화유산 복원과 고고학 발굴, 아무르 표범 보존과 매머드 복원 연구 사업 같은 공공 외교 차원의 참여 확대도 고대한다. 이를 위헤 민·관·학·시민단체로 구성된 유럽, 중동, 러시아 등 전문가 태스크포스 팀을 가동하기를 제안한다.
 
미국 최대 맹방이면서 우크라이나 협력 요청 거부한 이스라엘

안보와 경제협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무릇 외교란 이런 갈등 속에서 최적의 국익을 창출해나가는 것이 그 주된 목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외교적 행보가 우리에게 좋은 시사점이 될 수 있다. 누가 봐도 글로벌 최대의 미국 맹방이 이번 전쟁에서 미국과 협력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친러시아 행보를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에 최강의 방어무기인 아이언 돔 요격 무기를 제공해 달라는 우크라이나 요청을 거부했다. 휴대전화 해킹 스파이웨어인 페가수스 판매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코앞의 적대 세력인 시리아와 이란의 위협이 훨씬 중요하고 이들의 맹방인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의 유엔 인권이사국 퇴출에 찬성표를 던졌고, 부차 학살 사건에 대해 전쟁범죄로 러시아를 비난하는 분명한 태도를 보였다. 글로벌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철저히 국익 중심으로 움직이는 단호함과 일관된 외교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한국은 이제 중견국외교(MIKTA)의 중심 국가에서 G-9 체제 편입이 논의될 정도로 글로벌의 책임 있는 국가로 우뚝 섰다. 한·미 동맹의 틀 속에서 조망해 온 소극적인 외교가 아닌 국제 문제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앞장서고, 글로벌 분쟁이나 갈등에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류 열풍과 함께 지구촌에서 가장 사랑받는 나라가 한국이고 한국 여권이 가장 인기 있다고 한다. 이는 다시 없는 외교적 자산이다. 새 정부가 선보일 창조적 외교의 새 틀을 기대한다.
 
필자 프로필
 
△한국외대 △터키 이스탄불대학 역사학 박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중앙아시아연구원(UNESCO-IICAS) 학술위원(한국대표) △성공회대 석좌교수 △저서 Korea and the Muslim World, Historical Account 등 국내외 저서 90여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