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무용지물이 된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
2021-11-02 16:37
김태민 새길법률특허사무소 대표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최근 수입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 의무적용 시행을 발표하면서 중국산 김치에 대해 2021년 10월부터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에서 중국 김치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직접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해썹) 실사를 하면서 수입 김치의 안전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발표 자체만 보면 이미 국내에서는 매출 100억원 이상의 모든 식품업체와 의무 적용 대상 식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전부 해썹 제도 하에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가운데 수입 김치까지 확대해 식품안전을 강화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현실에서는 부실한 인증 관리가 매번 문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식품의약품안전처를 퇴직한 공무원들이 주요 임원으로 구성된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은 식품안전관리인증 업무에 해외제조업체 조사, 위생 검사와 교육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재직 인원과 예산 등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다.
대형 식품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인력과 예산 부족을 원인으로 내세우면서 오히려 한국식품안전인증원은 사건 이후 대부분 기형적으로 업무가 확장되고, 그만큼의 인력과 예산은 급증해 왔다. 그리고 최고위 임원진은 모두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퇴직공무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 2016년도에 제정된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은 원장을 포함해 무려 15명의 이사를 둘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상근직인 원장과 기획경영이사, 인증사업이사는 거의 모두 식품의약품안전처 퇴직공무원으로 구성되어 왔다.
물론 정식으로 공직자윤리위원회 심사를 거쳐 채용됐을 테지만, 지금까지 한 차례도 퇴직 공무원 이외의 사람이 원장이 된 사례가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퇴직공무원이 아닌 사람은 아예 원서조차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해 보인다. 이렇게 하부 조직과 상부 조직이 기름과 물처럼 출신부터 다르고,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절대적인 입김 아래 운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 역으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업무활동을 기대하기가 어렵고, 다양해지는 업무 종류와 폭증하는 인증 업체 수에 제대로 심사를 진행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건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매번 식품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해썹이 도마 위에 오르는 이유기도 하다. 해썹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인증 심사와 사후관리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돼 왔다. 인증 심사와 사후관리를 통과한 업체 중에서 식품 관련 법령 위반으로 적발되는 사건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의 홈페이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8월 31일을 기준으로 식품 인증업소가 8302개, 축산물 인증업소가 1만3809개에 이른다. 누가 보더라도 2만 개가 넘는 식품업소를 1년에 한 번씩 2인 1조가 인증과 사후 심사를 제대로 할 수나 있는지 의심이 갈 수밖에 없고, 이러다 보니 시간에 쫓기거나 대기업이라고 믿고 지나치는 일도 발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미 공룡처럼 거대해진 제도가 제도의 목적을 삼켜버린 형국이다. 이 정도라면 굳이 국가가 인증 제도를 통해 대상 업체를 선별적으로 관리할 것이 아니라 법령으로 그 기준을 규정하면서 모든 식품업체가 따르도록 일반화시켜야 한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나오고 있다.
전근대적인 국가주도형 행정제도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영업자가 구성원들의 최소한의 약속인 법률을 제대로 지키도록 감시·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이 우월적인 지위를 활용해서 민간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형식에 그쳐 위생 논란 등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식품안전관리가 중요하다면 모든 업체가 준수하도록 법령으로 규정해서 따르도록 하면 요식적인 인증 및 사후관리 업무가 사라지고, 이런 인력과 예산을 감시와 단속에 투입해서 기본을 지키지 않고 먹을거리로 장난치는 악의적인 기업을 솎아낼 수 있다. 이미 해썹 제도는 충분히 소명을 다했고, 지금은 새 부대가 필요한 시점이 도래했다. 최근 식품 대기업의 위생 논란을 계기로 제도를 개선하고 재발 방지를 제대로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