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심서 2021] 세종대왕 개혁의 길엔 언제나 '국민'이 있었다
2021-10-18 18:01
비합리적이고 부패한 세제, 즉 손실답험제를 혁파하여 공법을 도입했고 의료기관을 정비하고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향약채취월령 등 의학 전문서적을 발간하여 향약과 의학기술 보급에 전심전력하였다. 억울한 사형을 당하지 않도록 삼심제도를 정착시켰고 고문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고 사체에 대한 검시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여 행형제도에 획기적인 발전을 보게 하였다. 치평요람을 발간하여 정치의 모범사례를 정리해 주었고 식례상정소를 설치하여 끊임없이 행정절차를 개혁했다. 용관을 혁파하고 검소한 행정을 몸소 실시했다. 세계 최초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구빈법보다 150년 이상 앞서 병약자와 가난한 자의 보호는 국가의 책무라고 선언하였다.
세종의 성공한 업적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렇다고 그의 정책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다. 상당히 많은 정책에서 실패하거나 좌절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실패정책은 화폐개혁과 행정구역개편 정책이다. 저화라고 하는 지폐를 대신하여 동전을 유통시키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구리의 부족으로 실패했다. 과도하게 많은 군현을 통폐합하여 절반 가까이 줄이려고 했던 행정구역개편도 지방토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유야무야 되었다. 이 외에도 태종이 실시하려했던 호패법을 다시 시도하다가 병역을 피하려는 자들의 도피 때문에 좌절했고 신지(새 땅) 혹은 요도(미지의 섬), 그리고 과거 국경선이었던 공험진 탐험 노력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세종은 경제개혁, 세제개혁, 행정개혁, 국방개혁, 사회개혁, 복지개혁 등 정치, 농업경제,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복지, 국방, 외교 등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통치 분야에서 광범위한 세계 최초의 개혁을 이루어 낸 위대한 정치지도자다.
32년의 세종실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타나는 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들면 첫째로 겸손함이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준비된 임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큰형이 되었어야 할 자리를 아버지의 강권으로 할 수 없이 떠맡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10세에 세자가 되어 14년이나 세자 수업을 받았던 형이 실수 때문에 폐위되고 두 달 만에 갑자기 왕이 되었으니 세종은 제왕 수업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랬기에 항상 겸손하고 또 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양녕을 제거해야 한다고 도승지(비서실장) 김종서가 졸랐지만 끝내 세종은 형 양녕을 해치지 않았던 것도 그런 겸손함의 발로이다.
둘째 덕목은 아버지의 명에 대한 철저한 책임감이다. 즉위한 지 4년 만에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 후 28년 동안 임금으로 있으면서 세종은 단 한순간도 아버지의 명을 잊은 적이 없다. 그것은 생전에 손을 붙잡고서 내린 나라를 잘 다스리라는 명과 자신처럼 형제간의 우애를 해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부탁이다. 셀 수 없는 조정의 비판과 탄핵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양녕을 끝까지 지키고 보호해 준 것은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다. 양녕은 1450년 세종이 죽고 나서도 12년 지난 1462년에 죽었다.
세종의 디테일한 민유방본 정치는 형벌 바로잡기에 그치지 않는다. 형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먹고살기, 즉 경제에도 드러난다. 농사기술을 확대시키고 농경지를 넓히며 수차개발을 독려했다. 국가가 국민에게 끼치는 피해는 엄격하게 보상했다. 대표적인 것이 헌능보상 사건과 저울부정 사건에 대한 세종의 대응방식이다. 헌능(태종묘)공사로 인한 인근 농가 피해를 보상하라고 지적한 세종은 호조가 그 해 거둘 조세만 면제해 줬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했다. 능 공사로 인한 실제 농가피해를 측정하지 않고 정부가 받을 세수감소로 피해를 파악한 호조의 안일함을 질타한 세종은 실제 피해를 전액 보상하라고 지시했다. 또 당시 만연하던 저울 부정 사건의 대책을 의논하던 중 엄벌에 처하자고 하는 형조, 예조의 의견과는 달리 문제의 핵심은 형벌의 막중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울을 보편적으로 보급하는 데 있다고 파악하고 이천에게 정확한 저울 천오백여 개를 제작해 보급하도록 지시했다.
세종의 민유방본 정치의 또 다른 특징은 국민 혹은 관료들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소통정치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세종은 그 해법을 물어서 해결했다. 국가재난위기의 해법을 건의하라고 전국 유림에게 여러 번 요청했고 파저강 전투의 전략이나 여진 비변책략을 건의하라고 부탁했고 공법채택 여부도 국민에게 찬반을 물었다. 특히 여러 번 발생한 가뭄위기에 대한 세종의 청탁문을 읽어보면 그 심경을 알 수 있다. 1418년 즉위년에 닥친 가뭄재해에 대해 실록은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했다. ”내가 부왕의 무거운 부탁을 이어받고 지극한 정치를 해 풍년이 들기를 바랐으나 덕이 부족하고 천심을 받들지 못해 정치를 하자마자 한재가 드니 기도가 간절해도 비가 내릴 징조가 없어 밤낮으로 두려워 어찌 할 도리를 모르겠다. 바른 말을 자문하여 들고 재변을 그치게 하고자 하니 대소 신료 한량 원로들은 각자 품고 있는 정치의 잘못이나 백성의 아픔을 바로잡을 생각을 숨김없이 진술하여 나의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부응하게 하라. 틀린 말이라도 죄 주지 않겠다.(1418년 6월 2일)”
세종의 민유방본 정책의 가장 돋보이는 것이 훈민정음 창제다. 법을 몰라서 억울하게 죄를 짓고, 약과 치료방법을 몰라 억울하게 죽고, 예와 효를 알지 못하여 부모를 죽이는 패악을 막기 위한 가장 시급한 정책과제가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자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만리, 하위지, 정창손과 같은 반대세력의 갑자상소(1444년)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한글 법전을 번역하고 향약책과 예절에 관한 서적을 읽기 쉽게 발간하여 국민의 복지향상에 기여하게 한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시절이다. 하나같이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지만 만 분의 일이라도 세종대왕이 걸어 왔던 길을 흉내라도 내어 봤으면 국민은 한이 없겠다.
▷UCLA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조사 제1부 전문연구위원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 실장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