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구 칼럼] 동상이몽 한일관계 바꿀 새이정표 필요하다
2021-07-27 21:37
네 번째 긴급사태가 발령 중이던 지난 7월 14일, 도쿄를 방문한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단을 만난 일한의원연맹 회장단의 관심은 문재인 대통령의 도쿄올림픽 개막식 참석과 한일 정상회담의 필요성에 집중됐다. 중의원 부의장을 역임한 에토 세이시로 자민당 의원은 “일한 양국은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다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면서 문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충분한 시간은 아니더라도 스가 총리와 만나 양국 관계 개선의 계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스가 총리의 최대 버팀목인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도 “오시도록 문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면서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재인 대통령의 일본 방문은 무산됐다. 7월 19일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역사현안과 미래지향적 협력 방향에 관해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의미 있는 협의가 진행되었지만, “정상회담의 성과로 삼기에는 미흡하며” 그 밖의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일본 방문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우리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주한일본대사관의 2인자격인 소마 총괄공사의 ‘비외교적이고 무례한’ 발언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감의 뜻을 표했던 스가 총리는 10여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시적이고 응당한 조치를 신속히 취해”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구에는 묵묵부답이다. 7월 22일자 아사히신문 사설이 지적한 대로 관료들의 부적절한 발언을 “총리를 비롯한 정치 측이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조차 들 정도다.
2018년 10월의 대법원 판결 이후 사법부 판단 존중을 구실로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았던 한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일본 정부는 2019년 1월 한일 청구권협정을 둘러싼 분쟁 해결 절차를 규정한 제3조에 따라 외교 당국 간 협의를 요청했으나 한국은 응하지 않았다. 일본은 5월 한일 양국과 제3국으로 구성된 중재위원회의 설치를 다시 요구하지만, 한국이 이에도 응하지 않자 7월에는 제3국만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한국은 이에도 응하지 않았다. 일본은 대법원 판결이 청구권협정이라는 국제법에 반할 뿐만 아니라 협정상의 분쟁 해결 절차에도 응하지 않은 것이 국제법 위반이라면서 한국의 국제법 이중 위반을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6월 28-29일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어색한 악수만 했을 뿐 아베 총리와는 개별회담을 갖지 못했다. G20 정상회의를 마친 트럼프 대통령은 서울로 날아와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30일에는 판문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트럼프가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이 전 세계로 방영되고 의미 있는 북미대화로 이어질지 기대를 모았다.
2019년 12월과 2020년 3월 한일 수출관리 당국 간 국장급 협의가 열리고 한국 정부는 대외무역법을 개정해 캐치올 규제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수출통제 관련 조직과 인력을 강화하는 조치까지 취해 일본 측이 제기한 문제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성의를 보였으나 일본 측은 수출규제 조치를 철회하지 않았다. 한국은 WTO 제소 절차를 재개해 이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박수현 수석은 ‘정상회담의 성과’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일본 언론 보도를 보면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문제에서 양보하면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을 ‘정상화’한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7월 2일 열린 소부장 산업 성과 간담회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수출규제 문제 해결을 최소한의 정상회담 목표로 설정했음을 암시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지난 2년 동안 우리 정부는 ‘소부장 특별회계’까지 만들어 올해까지 6조 원에 가까운 자금을 공급하는 등 전방위적 지원을 했다. 불화수소의 일본 의존도를 10%대로 낮추는 등 3대 반도체 핵심품목에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100대 핵심부품의 대일의존도는 2019년 31.4%에서 24.9%로 6.5%p 감소하는 데 그쳤다. 대일무역의 구조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상반기만 해도 120억 달러 이상의 적자를 냈으며, 이대로 가면 올해 290억 달러 이상의 적자를 낼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2019년 8월 2일 임시국무회의)이며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2019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만들겠다는 문 대통령의 호언(豪言)은 감정적인 카타르시스를 주었을지 모르나 성과치고는 초라하다. 아베 정권이 무리하게 추진한 대일 수출규제에 관해서는 일본 내에도 비판이 강할 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에게 미친 경제적 손실도 적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로 정상회담의 성과로 제시했다가는 비판받을 소지가 오히려 농후했다.
현재의 한·일관계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양국은 전략적 의사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도쿄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계기로 정상회담을 개최해 역사문제에 관해 양국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화와 협의를 통해 양국 관계가 더 악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정상들의 의지를 천명하면 현재의 부정적 기류를 바꿀 수 있는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필자로서는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최근 인도태평양지역의 유일한 G7 참가국인 일본 이외에 한국, 호주, 인도를 추가해 G10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며, 기술이 앞선 민주주의국가 간의 협력 증진을 위한 새로운 협의체인 ‘D10’ 혹은 ‘T10’ 구상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G10이든 D10/T10이든 한국이 참가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에 미치지 못했던 1960년대의 가난한 한국이 아니다. 한국의 국력은 커지고 국제적 위상은 높아졌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아니지만, 1956년 12월 유엔 가맹 이후 22년 동안(11번) 비상임이사국을 역임한 일본의 정치·외교적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것도 현실이다. 선진국이 된 한국과 협력적 관계를 맺지 않으면 일본도 더 발전하기 어려워 한국과의 관계 복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라는 박수현 수석(7월 20일 연합뉴스TV 인터뷰)의 발언은 2012년 8월 독도를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해 일본 측의 반감을 사고 양국 관계 악화를 초래했던 상황의 데자뷔를 느낀다.
한·일관계는 단순히 이웃나라 일본과의 양자 관계를 넘어 한국 외교와 국가전략의 방향을 정하는 가늠자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2022년 3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후보들은 과연 어떤 대일외교를 구상하고 있을지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조진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도쿄대 법학박사(국제정치전공)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일본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