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한반도 외교시계] 한·미 회담 이후, 한·일 정상외교…박지원의 촉이 움직인다
2021-05-13 03:00
국정원장, 한·미정상회담 앞두고 치열한 물밑접촉
‘김대중-오부치 선언처럼.’
대표적인 ‘북한통’, ‘지일파’인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을 방문해 한·일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복원을 위한 불씨를 되살리고 있다. 박 원장은 12일 일본에서 한·미·일 정보기관장 회의를 가진 데 이어 일본 자민당 2인자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과도 비공개 회동했다. 13일에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와의 면담을 추진 중이다. 사실상 '특사' 자격의 방일인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박지원·이인영(통일부 장관)·서훈(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이어지는 삼각 편대를 구성했다. 특히 대표적 ‘반문파’인 박 원장을 국정원장에 파격 발탁한 것은 교착된 남북 관계는 물론 한·일 관계까지 돌파한 적임자로 봤다는 뜻이다. 취임 후 교착된 남북, 한·일 관계로 인해 '빈손'이었던 박 원장이 한반도 평화 시계를 되돌리기 위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 원장의 방일 성과는 이달 한·미 정상회담부터 오는 7월 진행되는 G7까지 숨가쁜 외교 이벤트의 가늠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 원장의 방일 이후 이달 말부터 오는 7월까지는 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간 첫 대면 회담, 영국 콘월에서 개최되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이를 계기로 한 문 대통령과 스가 총리 간 첫 조우, 일본 도쿄 올림픽 개최 등 '외교 빅 이벤트'가 줄줄이 이어진다.
◆한·일 관계의 달라진 기류··· '제2 김대중·오부치 선언' 기대감↑
지난 11일 방일한 박 원장은 12일 오전 한·미·일 정보기관장 회의를 가진 데 이어 오후에는 니카이 간사장과 만났다. 13일에는 스가 총리와의 면담도 추진 중이다. 박 원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당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내각의 운수장관을 맡던 니카이 간사장과 친분을 쌓았다. 스가 요시히데 정권 이후 '박지원-니카이' 라인에 기대감이 실린 이유다
박 원장은 지난해 11월에도 일본을 방문해 스가 총리와 만났다. 당시 박 원장은 '제2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제안했지만, 일본은 거절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1998년 한·일 양국이 발표한 ‘21C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말한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담은 내용이 양국 공식 문서에 처음 명시된 선언이다.
하지만 최근 한·일 관계의 달라진 기류가 감지된다. 지난 2월 취임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중(對中) 견제를 위해 한·미 관계 개선을 강조하는 데다 일본은 오는 7월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있다. 한국 역시 21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은 문재인 정부 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복원과 한·일 관계 개선의 마지막 이벤트나 다름없다. 양국의 '외교적 니즈'가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文·바이든 회담→文·스가 회동?··· 위안부 소송 주목
박 원장이 미·일 정보기관장들과 회동하면서, 잇달아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은 물론 한·일 정상회담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인 내달과 오는 7월, 한·일 정상 간 회동 가능성이 점쳐진다. 국내 외교가에서는 지난달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원고 패소로 일단락되면서 달라진 한·일 기류에 주목하고 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민성철 부장판사)는 지난달 21일 오전 고(故)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판단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패소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이 할머니는 일본에 위안부 제도 범죄사실의 인정, 진정한 사죄, 역사교육 등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사법적 판단을 받을 것을 재차 제안하며 항소하겠다는 뜻을 지난 5일 밝혔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한·일 관계 악화는 막은 것으로 판단, 내달 영국 콘월에서 진행되는 G7 정상회의 계기에 한·일 정상이 회담할 여지가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측 외교 소식통은 "일본 정부가 그간 한국에 징용·위안부 피해 배상 문제 관련 해법을 거듭 요구해왔다"며 "일본 정부 입장에서 이번 판결이 뚜렷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양국 관계에 있어 일종의 '진전'으로 여겨진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문 대통령과 스가 총리가 G7 정상회의에서 약식회담 형태로라도 대면할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이 나오는 셈이다.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 또한 이날 '일·한(한·일) 관계, 수뇌 자신이 사태 타개를'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고 G7 정상회의에 문 대통령이 초청된 것을 언급하며 "이 기회를 살려 일·한 양국 수뇌가 마주해 의견을 교환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언했다.
한·일 정상이 내달 실제로 만나 양국 해빙 무드 형성에 기여한다면 7월 도쿄 올림픽 개최 계기에도 양국 정상이 재차 회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정부는 그간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거듭 밝히며 도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도 기여하겠다는 뜻을 피력해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4일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신임 주한 일본대사로부터 신임장을 받으며 일본에 대해 "세계평화를 위해 협력해야 할 중요한 파트너"라고 평가, 도쿄 올림픽 성공을 기원했다. 문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식에서도 도쿄 올림픽을 거론하며 "한·일 간, 남북 간, 북·일 간 그리고 북·미 간 대화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은 도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협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북·미 접촉 첫 '물꼬'··· 美 정보수장 한국 방문 '대북정책' 미세조정
에브릴 헤인스 미국 국가정보국장은 이날 오전 일본에서 한·미·일 정보기관장 회의를 가진 데 이어 오후 곧바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날 오전 한·미·일 3국 정보수장이 만난 자리에서도 새로운 대북 정책 등의 논의가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헤인스 국장은 방한 기간 중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고 이어 문 대통령과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의 면담도 조율할 계획이다. 통상 정보기관장들은 행선 노출을 꺼리지만 이례적으로 공개행보에 나선 셈이다. 헤인스 국장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등 15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미국의 여성 최초 정보수장이다.
특히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촉매제인 북·미 접촉도 바이든 행정부 이후 첫 물꼬를 텄다. 전날 외신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새 대북 정책을 설명하겠다며 북측에 만나자는 제안을 했고, 북측으로부터 "잘 접수했다"는 답을 받았다.
젠 사키 미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브리핑을 통해 대북 정책 검토를 끝냈다고 밝혔으나 북한은 직후 권정근 외무성 미국담당 국장의 담화를 통해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은 대북 정책 검토 전과 후 최소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접촉을 시도했으나 북한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동안 무대응으로 일관했던 북한이 바이든 행정부에서 처음 반응을 보인 셈이다.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단계적·동시적' 방법론과 바이든 행정부의 '잘 조정된 실용적 접근'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미국 정부가 북한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제공할 의향이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북·미 대화에 기대감도 커진 상황이다. CNN방송은 이날(현지시간) 미국 고위 당국자의 말을 인용, "우리는 북한의 인도적 지원 요청을 검토하는 데 열려 있다"고 전했다.
이날 헤인스 국장과의 자리에서 이 같은 내용도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헤인스 국장의 방문은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한국 정부와 조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이 오는 21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 뒤 미국과의 접촉 여부에 대한 의사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어서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북정책과 북·미대화 재개 등 한반도 상황관리에 대한 한·미 양국의 세부적인 입장 조율이 필요한 상황이다. 또한 북한에 대한 백신 공급 이외에도 한국전쟁 종전선언, 남북 경협사업을 위한 대북제재 유연화,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등 '유인책'으로 제시할 사안에 대한 논의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지막 북·미 대화는 2019년 10월로,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는 스티븐 비건 당시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스웨덴에서 만났다. 당시 양측은 북한 비핵화 문제 등에 관한 실무협상을 벌였으나 입장차를 끝내 좁히지 못해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