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쿠팡 명백히 지배'...손 못 쓴 공정위, 국내 규정 정비한다

2021-04-29 12:00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 총수 지정 피해
외국계 한국인 동일인 첫 사례...'총수 없는 기업집단' 지정
"현행 규제로 외국인 지정 어려워"...동일인 제도 개선 방안 마련 착수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 [사진=쿠팡 제공]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이 동일인(총수) 지정을 피했다. 김 의장이 쿠팡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한국계 외국인'을 동일인으로 사례는 없다는 점이 공정거래위원회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공정위는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인 71개 기업집단(소속회사 2612개)을 5월 1일 자로 공시대상 기업집단으로 지정한다고 29일 밝혔다. 공시대상 기업집단 수는 지난해보다 7개 증가했고, 소속회사 수는 328개 늘었다.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순환출자, 일감몰아주기, 지주회사 등 각종 규제의 대상이 되고 내부거래 등을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대기업집단 동일인이 되면 배우자,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 등 특수관계인과의 거래에 대한 공시 의무도 생긴다.

올해 처음으로 쿠팡을 비롯해 한국항공우주산업, 현대해상화재보험, 중앙반도홀딩스, 대방건설, 엠디엠 아이에스지주 등 8개사가 공시대상 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 반면 KG는 완전 모자회사 간 합병으로 회계상 자산 총액이 감소해 공시대상 기업집단에서 제외됐다.

공정위는 "쿠팡은 자산총액이 2019년 3조1000억원에서 지난해 5조8000억원으로 크게 증가했다"며 "매출액이 늘고 물류센터 등의 유형자산이 증가해 공시대상 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김범석 의장이 쿠팡 동일인에 오르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김 의장 대신 쿠팡 법인이 동일인으로 지정되며 쿠팡은 '총수 없는 공시대상 기업집단'으로 선정됐다.  

공정위는 지금까지 외국계 기업집단은 국내 최상단 회사로 보고 모두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외국인이 동일인으로 이름은 올린 사례는 전무하다.

이에 따라 공정위는 당초 쿠팡을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하되 동일인에는 창업주인 김 의장 대신 법인을 지정하기로 잠정 결론 내렸다.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더라도 총수일가 사익편취 규제의 실효성이 낮다고 봤다.

하지만 김 의장이 쿠팡 의결권을 76.7%나 보유하고 있는데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동일인 지정에서 제외하는 것은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공정위는 지난 21일 이례적으로 쿠팡 동일인 지정 관련 비공개 전원회의를 열었다. 
 

김재신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은 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2021년도 대기업집단 지정 결과' 브리핑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공정거래위원회 제공]

공정위는 최종적으로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않았다. 그간의 사례와 현행 제도의 미비점, 계열회사 범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김범석 의장 대신 주식회사 쿠팡을 동일인으로 결정했다. 

김재신 공정위 부위원장은 "김범석은 한국 법에 따라 설립되고 영업 활동을 하는 쿠팡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동일인을 국내 법에 의해 새로운 의무와 제재 대상이 되는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 부위원장은 "동일인 지정은 처분성이 있는 일종의 법률 행위로 법적인 다툼 대상이 될 수 있다"며 "사실과 법리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봤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현행 경제력 집중 억제 시책이 국내를 전제로 설계돼 외국인을 동일인으로 정하더라도 제대로 집행될 수 있느냐는 만만치 않은 이슈"라고 전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특혜 논란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김 부위원장은 "국내 기업집단과의 법 적용에 있어서 차별점은 없다"면서 "쿠팡은 국내와 동일하게 모든 의무사항을 적용받고 대규모유통업법에 의한 감시 대상에도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동일인에 대해 공시의 의무와 더불어 본인의 회사나 친족의 회사가 있으면 사익 편취 규제 대상에 적용된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점"이라면서 "쿠팡이 제출한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현재 시점에서 김범석 개인이나 친족이 가지고 있는 국내 회사는 전혀 없다"고 부연했다. 
 
이 때문에 동일인으로 쿠팡을 지정하든 김범석 의장을 지정하든 계열 집단의 범위는 동일하다. 사익편취 규제 행위도 현시점에서는 발생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게 공정위 판단이다.  

공정위는 쿠팡 사례를 계기로 동일인 정의와 요건, 동일인 관련자의 범위 등 지정 제도 전반에 걸친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김 부위원장은 "정책 환경이 변화하며 외국인도 동일인으로 판단될 수 있는 사례가 발생했는데, 현행 규제가 국내를 전제로 설계돼 당장 외국인을 동일인으로 판단해 규제하기에는 집행 가능성과 실효성 등에서 문제 되는 측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동일인 제도 개선 후에 김범석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준과 요건에 맞으면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외국인을 지정했을 때 법 집행이 가능한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점은 없는지 등을 전체적으로 고려해서 제도가 개선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