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마윈과 런정페이 사이…중국기업 '생존 줄타기'

2021-04-29 04:00
"美에 찍힐라…" 화웨이와 '거리두기'
일대일로 제창…中정부 '눈치 살피기'
미중 갈등 속 中기업들 '좌고우면'

베이징 하이뎬구의 첨단산업 클러스터인 중관춘이하오 전경. [사진=이재호 기자 ]


"화웨이는 우리의 경쟁 상대도, 파트너도 아닙니다. 제2의 화웨이라는 수식도 싫습니다."

5G 이동통신 장비 제조업체 베이셀즈(Baicells)의 바이웨이(白煒) 부회장은 기자와 대화하는 동안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화웨이 출신이 창업했고,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기업이지만 화웨이와 엮이는 건 극도로 경계했다.

그러면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역점 사업인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전략이 회사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됐다고 강조한다.

중국 공산당의 눈 밖에 나면 안 된다는 두려움, 그렇다고 너무 '붉은 티'를 내면 미국의 제재가 엄습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동시에 읽혔다.

대부분의 중국 첨단기술 기업이 느끼는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국가에 충성 맹세를 하고 사업보국(事業報國·사업을 통해 나라를 이롭게 한다)을 외치지만,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밀려나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개혁·개방의 아이콘에서 인민의 고혈을 빠는 존재로 전락한 알리바바, 미국에 난타를 당하며 코너로 몰렸지만 중국에서는 국민 기업 소리를 듣는 화웨이.

그 사이 어딘가에서 중국 기업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지고 있다.
 

제2의 화웨이로 불리는 베이셀즈의 5G 통신장비 라인업. 인텔과 퀄컴 칩이 탑재돼 있다. [사진=이재호 기자 ]


◆인텔·퀄컴 없인 생존 불가

지난 26일 방문한 베이징 하이뎬구의 첨단산업 클러스터 '중관춘이하오(中關村壹號)'.

반도체·5G·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분야의 100여개 기업이 밀집해 있다. 지난해 산업생산 규모는 200억 위안(약 3조4300억원) 수준이다.

베이셀즈는 여기서 가장 주목 받는 기업 중 한 곳이다. 5G 통신장비가 주력 제품으로, 2014년 화웨이 출신 쑨리신(孫立新) 회장이 창업했다.

쑨 회장은 화웨이에서 무선 통신 특허 개발을 주도하며 '10대 걸출한 인재'에 선정됐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다른 창업 멤버도 에릭슨과 ZTE 등에서 경력을 쌓은 엔지니어들이다.

5G 관련 특허를 400개 이상 보유한 베이셀즈는 샤오미와 미국 퀄컴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현재 53개국 717개 기업에 납품 중이다. 독자 기술을 갖춘 베이셀즈는 경쟁력 있는 제품을 값싸게 공급할 수 있다.

당연히 주요 수출 지역도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의 개발도상국이다.

기자와 만난 바이 부회장은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0% 이상"이라며 "투입 비용이 적어 제조 단가를 낮출 수 있다는 게 우리의 강점"이라고 소개했다.

화웨이와의 기술 공유 여부를 묻자 "100% 자체 개발한 기술"이라며 "화웨이에 지급하는 로열티는 한 푼도 없다"고 대꾸했다.

사업 모델 외에는 화웨이와 겹치는 행보가 없다.

글로벌 5G 시장을 놓고 중국과 경쟁 중인 미국은 새로운 네트워크 표준인 'O-RAN'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화웨이 고사 작전의 일환이기도 하다.

미국과 유럽의 이동통신사와 반도체·소프트웨어 기업이 대거 참여했는데, 베이셀즈도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

신생 기업으로서 5G 시장 내 입지를 넓히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하지만 내막은 더 복잡하다.

화웨이는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이 설계한 통신 칩을 5G 통신장비에 탑재해 왔지만, 미국의 제재로 반도체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궁지에 몰렸다.

중국은 범국가적 역량을 기울여 반도체 산업 발전을 모색 중이지만, 아직 화웨이의 갈증을 해소해 줄 정도는 아니다.

칩 설계 능력이 없는 베이셀즈는 인텔과 퀄컴 제품을 사서 쓴다. 바이 부회장은 정확한 비율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중국산보다 인텔·퀄컴 칩이 훨씬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자칫 '화웨이 같은' 기업으로 인식돼 미국의 제재를 받게 되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 맞으면서도 버틸 맷집이 있는 화웨이와 다르다.

미·중 갈등이 경영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대해 바이 부회장은 "미국에도 페이스북 등 많은 거래처가 있다"며 즉답을 회피한 뒤 "정치적 이슈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중국 당국의 심기를 헤아리는 발언도 잊지 않았다.

바이 부회장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일대일로 연선 국가들이 주요 수출국인 건 맞다"며 "해당 지역의 경제 상황을 감안할 때 우리 제품이 적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소개 영상에는 동남아시아와 파키스탄, 중동,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일대일로를 따라 5G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국산화·기후대응 등 경영 화두로

베이징 남쪽 다싱구의 SMC투자관리유한회사는 세계적인 공압기기 제조사인 일본 SMC의 중국법인이다.

지난 1994년 설립돼 7곳의 공장을 운영 중이다. 공압기기는 자동차·가전·로봇·바이오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핵심 제조 장비다.

SMC 중국법인은 지난해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전년 대비 8% 증가한 84억2000만 위안(약 1조444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코로나19 발생 직후인 2월부터 이미 조업 재개에 나선 데다, 마스크·방호복 제조 업체에 각각 3만대 이상의 장비를 납품하면서 특수를 누렸던 덕이다.

올해 1분기 매출은 26억 위안으로 전년 동기보다 무려 53% 급증했다. 반도체 부족 사태로 관련 장비 주문이 폭주했다.

연간 전체로는 전년 대비 36% 늘어난 115억 위안의 매출 달성을 기대하고 있다.

SMC 중국법인의 마칭하이(馬淸海) 총경리(CEO)는 "코로나19 사태가 우리에게는 기회로 작용했다"며 "중국의 대내외 환경도 우호적인 편"이라고 말했다.

매출 가운데 중국 내 판매 비중이 85%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다국적 기업의 해외 법인이라기보단 중국 로컬 기업의 이미지가 강하다.

지난해 납부한 법인세는 4억9000만 위안으로 17% 증가했고, 올해는 8억2000만 위안으로 67% 급증할 전망이다. 중국 내 정책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마 총경리는 향후 주요 경영 화두로 미·중 갈등에 따른 핵심기술 자립과 기후변화 대응 등을 꼽았다. 시진핑 체제의 최대 국정 과제이자, 14차 5개년 계획(14·5계획)의 골자를 이루는 내용들이다.

그는 "미국의 (대중) 고립 정책에 따른 글로벌 경제 구조의 변화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며 "반도체와 신에너지 관련 장비를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키우겠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일본과 한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국가의 엔지니어들을 적극 영입하고 있다.

마 총경리는 "30년 전에는 일본이 세계 반도체 1위였다"며 "(모기업으로부터) 일본의 노하우를 들여와 중국 반도체 산업 발전을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이어 "중국 제조를 힘껏 도와 중국 창조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이뎬구 상무국의 헤이위 부국장이 첨단기술 기업 지원 및 규제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이재호 기자 ]


◆마윈과 런정페이 사이에서 방황

개혁·개방 40주년이던 2018년 중국 공산당은 그동안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민영 기업인 100인의 명단을 발표했다. 알리바바와 화웨이 창업주인 마윈과 런정페이의 이름도 포함됐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현재 두 사람의 처지는 많이 달라졌다.

반독점 규제의 덫에 걸린 마윈은 회사 경영권을 내놓고 재계에서 추방될 위기에 빠졌다.

플랫폼 경제를 평정한 그는 "법대로 세금을 내는 게 정부에 줄 수 있는 최고의 뇌물"이라며 호기를 부렸지만, 당국과 수차례 엇박자를 낸 뒤 나락으로 떨어졌다.

화웨이와 런정페이 회장은 미국의 전방위 제재로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배제돼 최악의 경영난을 겪고 있다.

하지만 화웨이가 망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중국 정부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화웨이는 중국이 그린 큰 그림 속에서 자기 역할을 철저히 수행했다. 관영 언론의 런정페이 관련 보도는 위인전에 가까울 정도다.

이에 대해 중화권 매체 둬웨이는 "마윈은 정경 유착이라는 작은 정치에 신경 쓰다가 국가 전략에 부응하는 큰 정치를 하지 못했다"고 비평했다.

베이징 소식통은 "공산당에 반항할 수도, 미국 의존도를 무시할 수도 없다는 게 중국 첨단기술 기업들의 공통된 고민"이라며 "마윈과 런정페이 사이의 중간쯤에 서서 좌고우면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마윈 알리바바 창업주(왼쪽)과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아주경제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