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 프리즘] 국가안보실장의 외교장관 등판과 고립외교 탈피

2021-01-21 15:53

 

[주재우 교수 ]


[주재우의 프리즘]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을 하루 앞둔 20일 우리 외교사에 ‘신의 한수’를 놓았다. 외교부 장관의 교체였다. 그것도 국가안보실장을 역임(2017~2020)한 정의용 실장을 외교부 장관에 기용한 것이다. 이는 청와대 소속의 국가안보실이 2013년에 설립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대통령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일까. 남은 임기 동안 그가 그리는 외교 구상에 이런 인사가 과연 꼭 필요한 것이었나. 우리나라에 전례 없는 일이기에 다른 나라의 사례를 빌려서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자. 

우리나라의 국가안보실은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같은 격의 기구이다.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그 업무의 장은 대통령의 직무실이다. 우리나라는 청와대이고 미국은 백악관이 되겠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국가안보실장과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이 각각 그 수장직을 맡는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외교국방안보와 관련 부처의 수장 간에 의견과 정책 조율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한다. 미국의 경우 그래서 국가안보보좌관은 거의 매일 대여섯 번 대통령을 알현한다. 따라서 미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에 대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 대통령의 이번 같은 외교장관의 인사는 미국에서도 드물다. 그 첫 번째는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의 등용이었다. 그는 1969년부터 1975년까지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1973년에서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지냈다. 두 번째 사례는 콜린 파월(Colin Powell)이었다. 그 역시 국가안보보좌관(1987~1989)을 역임하고 국무장관(2001~2005)에 임명되었다. 마지막 인사는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였다. 국가안보보좌관(2001~2005)을 먼저 역임한 후 국무장관(2005~2009) 자리에 재기용되었다.

미 대통령이 이 같은 인사를 단행한 것은 미국 국무부 230년의 역사와 국가안전보장회의 67년사에서 단지 세 번밖에 없었다. 물론 국가안전보장회의가 1953년에 설립되어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졌기에 비교가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역대 국무장관이 70명 있었고 국가안보보좌관 30명(보좌관 서리 2명 포함)이 배출된 사실에서 정량평가를 해도 이는 매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의 재기용 시기도 흥미롭다. 키신저는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약 2년간 겸직했다. 라이스는 대통령이 재임하면서 재등용했다. 파월의 경우 냉전시기의 마지막 국가안보보좌관을 아버지 부시(George H. Bush) 대통령 시기에 지냈고 그의 아들(George W. Bush)이 4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국무장관 자리에 올랐다. 이들의 중용은 어떠한 연유에서, 어떠한 의미에서 이뤄졌을까. 

우선 직무상의 연속성이 가장 큰 이유다. 키신저와 라이스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 두 사례의 의미는 상당하다. 당시 미국의 외교가 전환점이라고 하는 두 가지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섰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키신저는 베트남전쟁 종결과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등을 책임지고 있었다. 라이스는 북핵위기와 9·11 테러사태의 후속전쟁 등을 총괄하는 책임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둘째 이유는 대통령의 이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다. 국가안보보좌관직은 대통령과 행정부의 외교안보국방정책에 대한 부처 장관들의 의견과 정책제안을 대통령을 대신하여 조율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다. 국무장관의 경우 대통령의 외교적 의중과 사상을 부처에 전하고 외교에서 이행되게끔 관리·감독한다. 키신저와 라이스 모두 재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에 국무장관에 올랐다. 대통령 첫 임기의 엄중한 책무를 완성시키는 데  이들을 최적의 적임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라이스의 경우 회고록에서도 기술했듯이 부시 대통령은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국가안보보좌관 시절 때처럼  매일, 언제든지 연락하고 방문해도 된다면서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성과가 능력을 대변한다. 키신저는 1975년 베트남전쟁의 종결과 미·중관계 정상화의 토대를 이뤘다. 특히 미·중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그는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겸 외교부 부장의 생전에 기본적인 원칙과 프레임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정권교체로 1977년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가 중국과 합의한 사항은 2년 뒤 미중수교의 결실에 본바탕이 되었다.

라이스는 9·11 테러사태로 빚어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하나를 해결했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2003년에 생포하고 2006년에 처형함으로써 이라크 전쟁의 종결을 볼 수 있었다. 비록 반쪽의 성공이었지만 미국으로서는 더 이상 두 개의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결실이었다. 그러면서 다음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정책 출범을 가능케 했다. 즉, 미국이 다시 아시아에 신경을 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또한 2차 북핵위기 사태에서 6자회담을 출범시켰고 임기 동안 북한 비핵화를 위한 합의도 도출해냈다. 공교롭게 그의 임기와 함께 6자회담도 종결되었다.

정의용 신임 외교부 장관 인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일까. 대다수의 국민이 이에 동의할까. 현실은 이런 전례 없는 인사에 많은 이들이 의아해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회전문’인사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은 상기한 미국의 사례에 견주어 이번 외교부 장관의 인사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설득력있게 잘 설명해야 한다. 지난 18일 열린 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발언에서 이번 인사에 대한 대통령의 의중을 엿볼 수 있다.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의 완성을 위해 모든 외교적 노력에 집중하겠다고 천명했다. 즉, 대북정책의 연속성과 연관해서 국가안보실장의 외교장관 임명을 설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를 위해 그가 소개한 방법론은 벌써부터 논란이 되고 있다. 비핵화 프로세스를 위해 한미 연합군사훈련 등 한미동맹의 의제를 북한과 협의하겠다는 발언 때문이다. 적국과 우리의 국방과 안보문제를 협의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대통령의 의지를 미국 측에 오해 없이 전해야 하는 중책이 정의용 외교부 장관 내정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물론 한미군사훈련과 같은 의제는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공식 논의될 것이다. 그러나 외교 수장으로서 북한관련 사안의 외교적 해결을 위해 직접 외교협상을 벌여야 하는 것이 외교장관의 책무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신임 외교장관의 첫 과제는 이미 예사롭지 않다.

정의용 내정자는 3년여 동안 국가안보실장으로서 대통령을 보필하면서 서로간의 신뢰를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의 외교성과를 고려하면 문 대통령의 내정자에 대한 신뢰의 원천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교와 국방 문제 등 어느 하나 결실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북관계에서 우리의 국익과 의지대로 미국과 어떠한 결실을 내지 못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는 사드문제로 인한 제재를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작년 9월에 출판된 허버트 맥매스터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전장: 자유세계 방어를 위한 전쟁>에서는 그가 정의용 전 실장에게 사드 추가 배치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사례까지 소개되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국민이 우려하는 우리나라의 외교적 고립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아니, 미국의 정권교체로 우리 외교가 심기일전하여 고립을 탈피할 수 있는 호기가 도래했다. 북한의 8차 당대회 결정문과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사를 근거로 새로운 전략을 짜면 된다. 북한의 입장은 2018년 신년사에서 변한 것이 없다. 바이든은 동맹의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북·미 양국의 요구를 절충할 수 있는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 이에 성공하면 가령 중국과의 사드문제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략사고에서 외교를 펼쳐야 대통령이 염원하는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의 성공을 위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