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구 칼럼] 협량(狹量)한 토착 왜구와 비국민(非國民) 비판을 넘어서자

2020-10-26 11:18

 

[조진구 교수]


순간 나의 귀를 의심했다. 현대 한국문학의 한 획을 그었다는 조정래 선생이 지난 10월 12일 등단 50년 기자간담회에서 했다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선생은 분명히 “150만, 60만을 헤아리는 친일파들을 전부 단죄해야 한다”면서 “토착 왜구라고 부르는,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면 무조건 다 친일파가 되고 민족 반역자가 되며 일본의 죄악에 대해서 편들고 역사를 왜곡하는 그자들을 징벌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운동이 지금 전개되고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9년 가까이 일본 유학 생활을 했던 필자는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을 편든 적도 왜곡한 적도 없다. 민족 반역 친일파를 징벌하기 위한 법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필자는 알지 못하나,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필자를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고 징벌해야 한다는 말은 필자는 물론 가족과 부모에게 이 이상의 모욕적인 말은 없을 것이다.

전전(戰前) 일본에서는 국가와 군의 정책에 비협력적인 사람을 비난할 때 ‘비국민(非國民)’이란 말을 썼다. 그런데 일본 사회가 보수화해 ‘넷 우익’이라 불리는 극단적인 내셔널리스트가 ‘행동하는 보수’를 자처하며 거리로 나오고 일본의 전통과 문화, 심지어 전전의 군국주의 일본을 미화하려는 사람들조차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본 거주 외국인의 권리를 옹호하거나 어두운 일본의 과거 역사를 들추며 반성과 사죄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일본인을 ‘비국민’이라 부르며 비판한다. 때로는 매국노나 국적(國賊)이란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2005년 3월 16일 시마네현 의회가 일본이 독도를 강제로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던 2월 22일(1905년)을 ‘다케시마(일본에서 독도를 부르는 이름) 날’로 정하는 조례를 제정해 한·일관계는 급랭했다. 2004년 7월 21일 제주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중 과거사 문제를 외교 쟁점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이듬해 3월 17일 정동영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통일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시마네현의 조례 제정을 제2의 한반도 침탈로 규정했다. 성명은 시마네현의 조례 제정은 “단순한 영유권 문제가 아니라 해방의 역사를 부정하고 과거 침탈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로부터 열흘 뒤인 3월 27일 아사히신문은 와카미야 요시부미 논설주간의 ‘다케시마와 독도, 이를 우정도(友情島)로라는 몽상(夢想)’이란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놀랍게도 와카미야는 어업 이외에 가치가 적은 무인도를 위해 전쟁을 할 수는 없다면서 일본이 독도를 한국에 양보하면 어떠냐고 피력한다. 중·러와 영토분쟁을 벌이는 일본이 독도를 양보하는 대신, 한국은 일본의 영단(英斷)을 높이 평가해 독도를 ‘우정도’로 바꿔 부르고 중·러와의 영토분쟁에서 일본 입장을 지지하고 한·일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단숨에 체결해 양국 간의 연계를 강화하자는 것인데, 노무현 대통령이 ‘외교 전쟁이라 할 만한 각박한 상황’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엄중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영토의 포기는 가히 ‘국적’이라 불릴 만했다. 와카미야는 그것도 예상했었으며, 실제로 칼럼 게재 이후 죽이겠다는 우익들의 협박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한다.

스가 정권이 출범하고 한 달 열흘이 지났다.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가 정권 출범 직후인 9월 중순 65%였던 내각 지지율은 한 달 만에 12% 포인트나 하락했다. 각 분야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과학자들의 모임이자 지혜의 요람인 ‘일본학술회의’가 추천한 신규 회원 가운데 6명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스가 총리가 임명하지 않았던 것이 중요한 하락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공교롭게도 6명은 모두 일본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데,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이념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목소리에 귀를 닫는 독재자가 되려는가' 하는 우려조차 들려온다.

11월 초의 미국 대통령선거 뒤에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 한·중·일 정상회의의 개최 여부가 불투명하다. 스가 총리의 한국 방문을 위해서는 강제징용문제와 관련해 원고 측이 압류한 일본기업의 자산 현금화가 이뤄지지 않을 것을 보장해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뜻이 한국 측에 전달되었다는 보도도 있다. 지난 칼럼(‘한일 역사화해를 위한 제언’)에서 지적했듯이 강제징용문제의 해결 없이 한·일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 한·중·일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9월 24일 스가 총리와의 전화통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최적의 해법을 함께 찾아 가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한국 정부가 피해자 측을 설득해 압류 일본기업 자산의 현금화 절차 동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난 10월 21일 외신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강제징용문제를 “2021년 도쿄올림픽 전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면서 “이제는 두 나라 정부 모두 외교 당국 간 협의에 맡기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도 말했다. 남관표 주일대사는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낙연 대표의 질문에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스가 총리는 아베 총리와 다른 부분도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무총리로서 강제징용문제의 해법을 모색했던 최고책임자였던 이낙연 대표의 말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여당이 움직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남관표 대사의 말은 필자가 일본 언론이나 서울과 도쿄의 일본인 지인들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토착 왜구 비판이나 일본 우익들의 비국민 혹은 국적 비판은 너무나도 협량(狹量)해 옹졸함마저 느껴진다. 이를 극복해야 악화된 한·일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양국과 국민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다.

최근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오염수 해양방출 여부 결정을 11월로 미뤘다. 우리 국민의 불안감을 고려하면 이 문제는 한·일관계를 회복 불가능상태로 만들 또 하나의 뇌관이 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동맹국이자 중국이 최대 교역상대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루빨리 서훈 국가안보실장을 일본에 보내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기본적 가치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 일본 정부와 국제정세 및 한·일관계 전반에 걸쳐 심도 있게 협의해야 한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양국 국민이 부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