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진의 異意있습니다]성폭력 피해자 지원인가, 또다른 ‘2차 가해’인가
2020-10-07 18:00
“그 기사를 쓰신다면 내용과 관련 없는 엉뚱한 논란에 휩싸이지 않을까요?”
얼마 전, 미디어 전문지의 고참기자 J씨로부터 들은 충고다. 그 무렵 필자는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안타까운 사망사건과 관련된 ‘어떤 사실’을 취재했다. 박 시장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바로 그 비서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취재를 했고, 여러 차례 확인까지 마쳤기 때문에 사실관계는 명확했지만 그 내용이 상당히 민감한 것이어서 고민스러웠다. 사실이라면 보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인 만큼 후폭풍이라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의 고민이라면 통상적으로 ‘이성을 따를 것이냐, 감성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있는 그대로 드러낼 것이냐, 잠시 숨을 죽이며 사태추이를 관망할 것이냐’인 경우다.
아무리 사실이지만 고소내용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 모호한(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 거론된다는 것은 최소한 유쾌한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전화를 건 것이 앞서 말한 ‘어느 미디어 전문지의 고참기자’ J씨였다. 기사의 내용과 취재경위를 조용히 듣고 있던 그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직 “지금 그 기사를 쓴다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2차 가해라는 비난을 들을 것”이라는 한 마디를 예언처럼 툭 던졌다.
하지만 이런 유의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그리고 나는 정해져 있는 결말처럼 다 써둔 기사를 하드디스크 폴더 속 깊은 곳에 다시 조용히 밀어넣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기사를 만천하가 볼 수 있도록 꺼내놓으리라 마음 먹었지만 기약은 없었다. 기약은 고사하고 어쩜 영영 다시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그 기사를 쓴다면 영락없이 ‘2차 가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데, 누가 봐도 결과가 뻔하다는데,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 순 없었다.
요즘 세상에 ‘2차 가해’라는 말보다 무서운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제 아무리 명성이 자자하고 존경받던 대기자라도 ‘이 문제’를 잘못 거론했다가는 순식간에 ‘2차 가해자’로 낙인찍혀 새까만 후배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는 상황이다. 노조위원장을 몇 년씩 지내며 언론자유를 위해 맨 앞에서 투쟁했던 백전노장의 선임기자도 가차없이 징계에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2차 가해’라는 낙인이다.
심지어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자는 지극히 평범한 주장도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난다고 지적 받는 상황인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게 취재를 접은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내가 쓰고자 했으며, 고민과 두려움 끝에 쓰기를 포기했던 그 이야기는 ‘피해자’의 대리인이라는 김재련 변호사의 입을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피해자’인 박 시장의 전 비서가 지난 4월 다른 서울시 공무원으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당했으며 그 사건을 김 변호사와 상담하는 과정에서 박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는 것과 4월 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을 전후해 박 시장 관련 건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됐다는 내용이다.
보기에 따라, ‘4월 사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박 시장 건을 이른바 ‘별건’으로 이용하려 하지 않았느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더구나 피해자가 "박 시장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피해라고 인식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말한 바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심은 더욱 여러 가지로 가지를 치게 된다.
하지만 이를 기사화해 거론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2차 피해’가 우려되기도 한다. 모종의 인과관계가 의심이 되기는 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4월 사건’을 기사화하지 않기로 한 것을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김 변호사가 ‘4월 사건’을 먼저 공개한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 측의 대리인이라면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본다.
피해 당사자가 원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변호사라면 말렸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의 언행이 누군가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 사안이라면 다른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피해자 대리인이라도 해도 마찬가지다. 2차 가해라는 지적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으로 붙여져서는 곤란하다.
김 변호사가 피해자 지원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치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