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스가 총리 출범과 한일 관계

2020-09-28 13:51

[이병종 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


신병으로 사임한 신조 아베 후임으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새로 취임함에 따라 향후 한일 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 현재까지 상황으로는 크게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수교 후 최악의 상태인 한일 관계는 과거사 문제에다 무역, 안보 분야까지 확장되어 실타래처럼 꼬인 상태이지만 신임 스가 총리는 전임 아베 총리의 강경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여전히 한국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국제법을 위반했음을 지적했다.

스가 총리의 등장 배경을 살펴볼 때 이는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상황이다. 전임 아베 총리 시절 관방장관으로 그림자처럼 2인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스가 총리가 새로운 행보를 보이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특히 외교 분야에 취약하다는 평을 받는 그로서는 새로운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가 새로 구성한 내각은 전임 내각의 인사들을 대부분 유지했다. 특히 작년 한국에 보복적인 수출 규제를 강행한 가지야마 경제 산업성 장관을 유임시킨 것은 한국에 대한 압력을 계속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스가 총리가 차기 총선 때 까지는 현재의 강경 대한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관방장관 시절 그는 특히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심하게 비난했는데 이 점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 법원이 배상을 위해 문제가 된 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 매각을 단행한다면 한일 관계는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로 악화될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일년 정도 남은 차기 총선에서 만약 스가 총리가 승리하여 재집권한다면 정책 기조가 바뀔 수 있다고 예측했다. 스가 총리도 자신감을 갖고 자신만의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러나 설사 그가 재집권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2022년 3월에는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게 되는데 그 때에는 또 다시 반일 감정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한국의 현 집권 세력이 국익을 위해 한일 관계 개선을 추구하기 보다는 여당과 시민단체 지지자들의 압력 때문에 반일 카드를 내세우게 될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사실 한국의 젊은 유권자들에게 일본 문제는 언제나 가장 첨예한 이슈 중의 하나인데 정치인들이 이를 포기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변수는 최근 불거진 정의기억연대 관련 비리 사건이다. 정의연과 그 전신인 정대협을 통해 위안부를 위한 활동을 주도했던 현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국회의원은 최근 회계부정 등 준 사기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간 반일 운동에 앞장섰던 시민단체의 역할에 대해 일반인들의 회의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시민단체들이 겉으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봉사한다면서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챙겨온 것으로 드러난다면 이들의 도덕성은 크게 훼손될 것이고 이는 향후 반일 운동의 동력을 대폭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사실 정의연 비리 사건을 처음 폭로한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 관련 시민 운동이 그간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증오심만을 키워 주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보다는 교육과 교류를 통해서 양국의 미래 세대들이 서로 신뢰와 우정을 쌓기를 희망했다. 이는 향후 건설적인 한일 관계를 위해 꼭 필요한 조치로 여겨진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 세대가 지금처럼 서로에 대한 반목과 증오만을 배우게 된다면 미래 한일 관계는 지금 보다도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참고할 만한 사례가 평화의 씨앗(Seeds of Peace)이라는 프로그램이다. 1993년 미국의 존 왈라치(John Wallach)라는 언론인이 시작한 이 교류 협력 사업은 적대 관계에 있는 국가들의 청소년과 교육자들을 미국 메인 주의 한 장소에 모아 놓고 매년 한 달 동안 여름 캠프를 진행한다. 아랍국과 이스라엘, 인도와 파키스탄 등 적대국들의 젊은이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우정을 쌓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간 6,000 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현장에 이들 졸업생들이 참석해 전 세계인의 평가를 받은 적도 있다.

이 프로그램이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악용된다는 비판도 있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은 적대적 행위를 지속하면서 미래 세대에게 평화에 대한 의무를 족쇄처럼 지워준다는 비난이다. 피해를 가하는 측과 당하는 측을 동일하게 취급하며 모두에게 관용과 이해를 요구한다는 지적도 있다. 효과에 대한 의문도 있다. 이 사업이 수 십 년 지속되었지만 중동의 평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일 관계를 고려할 때 미래 세대를 위한 이러한 사업은 꼭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현재 양국의 지도자들이 정치적인 이해 타산 때문에 관계 개선을 하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은 비극적인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룬 후 그 직후부터 청소년을 위한 이러한 교류 협력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유렵 통합이라는 어려운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이런 미래가 불가능하리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