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균 칼럼] 산으로 가는 ‘재난지원금’
2020-09-10 18:14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으면서 여야 사이에 이념적 ‘자리바꿈’이 일어나고 있다. 야당이 되살아나기 위해 5·18 사죄를 포함하여 정강정책의 혁신을 표방하는 사이에 여당은 좌표를 잃고 정책이념적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다. 여당의 개념 없는 퇴행은 특히 2차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논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사실 1차 ‘재난지원금’도 명칭을 둘러싸고 ‘재난기본소득’과 경합을 벌이다가 기본소득과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각별한 연관성 때문에 발탁된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도 총선을 앞둔 ‘전 국민 지급’이었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취지는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지급에서는 ‘한정된 재원을 필요한 부분에 두텁게 지급한다’는 빌미가 관철되었다. 하지만 선별 지급의 기준결정이 지연되다 보니 생계현장의 아우성은 커지고, 무엇보다 사각지대에 대한 우려가 가장 크다. 더욱이 2차 지원금에서는 이념적 퇴보가 소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표방하면서 출범했고 실제로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으로 실행에 옮겼다. 그렇지만 대·중소기업 동반성장과 같은 보완조치의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소득주도성장은 비록 좌초되었지만 폐기된 적은 없다. 적어도 신자유주의를 분명하게 비판하는 ‘사람 중심’의 소득주도성장 정신은 살아 있다.
한국의 기재부는 다른 선진국 정부에 비해 유별나게 국가채무비율에 집착하고 있다. 2020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국채비율 40%를 넘지 않으려는 기재부 장관을 문재인 대통령은 질책한 바 있다. 기재부가 이처럼 국가채무비율에 집착하는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모순이 있다. 하나는 국가채무비율을 한번 올라가면 결코 내릴 수 없는 지표인 것처럼 세뇌시키는 불순함이다. 독일은 2008년 65.5%까지 개선되던 이 비율을 2008~2009년 발발한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2010년 82.4%까지 높였다가 2018년 다시 61.9%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관리가 왜 불가능한지 의문이다. 20년 넘게 기재부가 연구하고 있는 ‘원화의 국제화’에 왜 아무런 진전이 없는지도 궁금하다. 기재부가 국가채무비율에 집착하는 것은 국민 기만이자 스스로 무능함을 실토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채무비율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맞지 않는다. 일본이 250%가 넘는 국가채무비율에도 불구하고 국가부도가 나지 않는 이유는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채 대부분을 일본우정국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채무비율 120%에도 국가부도를 경험한 이유는 채권단이 국제투자은행들이었기 때문이다. 채무비율 자체보다 채권단의 국적이 중요하다.
176석을 얻은 자신감을 배경으로 민주당은 21대 국회를 일하는 국회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밤샌다고 무조건 공부 잘하는 것 아니고 열심히 노 젓는다고 배가 항구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 중심’의 철학에 진정성이 실려 있다면 모든 정책을 ‘사람’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정부가 ‘선별’ 기준을 마련하느라 밤새는 동안에도 살아 숨쉬는 ‘사람들’은 매일 먹고 마시고 자식들을 키워야 한다. 보수 언론의 칭찬에 목말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목말라 아우성치는 ‘사람’에게 물병을 안겨주어야 한다. 통신비 2만원도 통신회사에 지급해서 ‘사람’ 화를 돋우지 마라. 재난지원금이 ‘보편’에서 ‘선별’로 달라지는 것이 단순히 수혜 범위의 축소와 예산 절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중심’의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