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5주년, 역사기획] 해방직전 서울, 맹수 188마리가 독살됐다
2020-08-13 09:28
박하늘인턴의 '시간의 숨바꼭질' - 8.15와 6.25, 창경원 동물 지옥史
우리는 1945년 8월15일을 빛을 되찾은 날로 기억하지만, 어떤 짐승들에게는 지옥이 닥쳐온 날이었다.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20일 전인 7월 25일. 창경원 동물원 회계과장 사토는 조용히 직원들을 불러모았다. “패전이 임박했다. 도쿄로부터 지시가 내려왔다. 혼란 중에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모든 동물을 독살하라.” 이후 일제가 긴급 퇴각하는 와중에 맹수들이 탈출해 경성(京城) 전체가 정글이 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사토는 사육사들에게 극약을 나눠줬다.
그날 밤 창경원은 동물들의 아비규환이었다. 사육사들은 독약을 바른 먹이를 던졌고 그것을 받아먹은 맹수들은 고통으로 뛰고 울부짖었다. 창경원 내부는 죽어가는 짐승들의 포효가 가득했다. 사육사들은 그간 날마다 자식처럼 대했던 짐승들이 고꾸라지고 쓰러지는 모습 앞에서 함께 오열했다. 당시 동물원에는 맹수 63종 188마리, 새 19종 519마리를 포함해 모두 186종 718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 대대적인 살육의 밤에 맹수 188마리가 빠짐없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동물의 사체를 처리하느라 바빴을 창경원에도 이윽고 8.15 해방의 그날이 왔다.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만세’를 불러야 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정부가 미처 수립되지 못한 해방공간에서 동물원 짐승들을 챙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겨우 꾸린 관청에서 건성으로 내놓는 동물 지원책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폐원(閉園)된 동물원에선 또 다른 비극이 진행됐다. 이번엔 독살보다 더 참혹한 아사(餓死)가 줄을 잇고 있었다. 동물원 내부엔 죽어가는 짐승들의 악취로 가득했다. 창경원에는 한국인 사육사 3명만이 남아 동물을 보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죽어가는 짐승들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당시 사육사 박영달은 자신의 집 5채를 팔아 사료비로 충당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제대로 동물들의 배를 채워줄 수 없었다. 동물도 사람도 지쳐가는 가운데 광복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고 겨울이 왔다. 이듬해 1월 마침내 창경원이 다시 개장됐다. 기어이 살아남은 동물들은 조국을 회복한 국민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 감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일제의 독살 만행보다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났다. 개전 당시 동물원은 그대로 운영되고 있었다. 사육사들이 남아 동물을 보살폈다. 하지만 1년 뒤 중공군이 개입했고 대대적인 1·4후퇴가 진행되었을 때 동물원은 폐장했고 사육사들은 피난행렬을 따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때에도 맹수 상당수가 죽임을 당했다. 사육사 박영달은 동물들을 두고 떠나는 길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앵무새를 품에 안았다. 이 새는 “잉꼬상 곰방와” 하면 “보꾸상 곰방와”로 일본어 대꾸를 하던 반려 같은 새였다. 아내는 “살림도 다 버리고 가면서 새가 다 뭐냐?”면서 핀잔을 줬다. 슬그머니 새를 내려놓았더니 “오마에, 바가바가(너 멍청이)”라며 박 씨를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새를 놔둔 채 그는 피난길에 올랐다.
두 달 뒤 서울이 수복됐다. 박영달은 동물원이 어떻게 됐나 걱정스러워 거기부터 들렀다. 창경원은 저승을 방불케 했다.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낙타와 사슴, 얼룩말은 중공군이 도살해 잡아먹은 듯 머리만 남아 뒹굴고 있었다. 여우와 너구리, 오소리, 살쾡이는 굴과 돌 틈에 끼어 죽어 있었다. 굶어죽고 얼어 죽고 총칼에 찢겨 죽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채, 죽어간 동물들을 떠올리며 오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창경원은 원래 왕이 기거하던 궁(宮)이었다. 이 궁궐은 어쩌다 동물원이 되었을까. 여기엔 조선황실에 대한 일제의 조롱과 폄하가 숨어있다. 조선의 가장 높은 존재의 거처를 ‘짐승’의 거처로 만든 건, 국가 전체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국가를 지킬 힘도 의지도 없었던 조선 말기였다.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즉위한 뒤 그 거처를 창덕궁을 옮겼다. 일제는 1909년 순종을 위로하는 구경거리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창덕궁 옆 건물인 창경궁을 위락시설로 바꾼다. 전각을 헐고 동물과 식물을 들였다. 1911년 창경궁은 창경원(苑)으로 격하됐다.
적도 인근의 섬에서 캥거루를 들여왔고 인도에서 동물 장사를 하던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커다란 뱀을 들여왔다. 제주도의 조랑말이 들어왔고 일본 맹수무역상에게서 구매한 사자가 들어왔다. 미국산 늑대와 태국산 코브라가 창경원 식구가 됐다. 세계 각국의 온갖 동물들이 조선의 경성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그 동물들의 수난과 최후는 위에서 보았다.
한국전쟁 이후 창경원 동물원은 이 나라 정부의 주도로 새로운 ‘정글’이 만들어졌다. 전쟁 직후엔 전방 군인들이 산과 들에서 잡은 야생동물로 채워졌다. 이후 정부기관과 기업, 독지가들이 기금을 모았다.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은 코끼리를 들여왔고 한국은행은 사자를 들여왔다. 하마와 얼룩말, 타조, 두루미, 물개와 같은 동물들이 기업기증으로 창경원 가족이 됐다. 이전의 모습을 회복한 이곳은 하루 2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창경원은 1984년 창경궁으로 복원된다. 동물원은 2년 뒤 개장한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긴다. 서울대공원은 창경원동물원과 서울대공원에서 살다 안타깝게 숨진 짐승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동물들이 역사를 기억한다면, 8.15와 6.25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인간 오락과 인간 편의로 살리고 죽여 왔던 악몽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역사는 인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살아온 짐승들의 뇌리 속에서도 면면히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문득 인간이 부끄럽게도 느껴진다.
아주경제 논설실 박하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