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도 잡은 코이케, 4년뒤엔 日 총리?
2020-07-08 18:20
[노다니엘의 일본 풍경화] (13)
지난 7월 6일, 동경도지사 선거에서 여성정치가 고이케 유리코 (68)가 압승을 거두었다. 총 366만표라는 사상 두번째의 득표수로 앞으로 2024년 7월까지 4년의 임기를 맡게 되었다. 고이케가 누구인가를 말하기 전에, 우선 도쿄도지사가 어떤 자리인지 보기로 한다.
동경이라는 곳
한국에 있는 도지사(道知事)는 도(道)라는 행정구역의 최고책임자이지만, 도쿄도지사(都知事)는 도(都)라는 행정구역의 최고책임자이다. 일본 행정구역에 都는 하나 밖에 없다. 일본의 행정체계에서 광역자치단체는 1도(都)(도쿄도), 1도(道)(혹카이도), 2부(府)(오사카, 교토), 그리고 43개의 현(県)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안에 792개의 시(市), 743개의 정(町), 183개의 촌(村)으로 구성되는 행정단위들이 들어있다.
도쿄도의 경우, 그 안에 중심부에 23개 구가 있고 외곽으로 26개 시가 있으며, 동쪽 바다에 2개의 정과 7개 촌이 들어 있다. 이렇게 구성되는 동경도에는 현재 140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2020년의 동경도 예산이 7조4000억엔 (약 75조원)이다. 인구 천만 미만에 예산 35조원을 가진 서울특별시보다 훨씬 큰 자치단체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행정구역상으로는 동경도와 분리되어 있지만, 인접한 지바(千葉), 사이타마(埼玉), 가나가와(神奈川)라는 세 현을 포함한 ‘수도권’에는 약 3700만명이 살고 있어, 일본인구의 34%에 해당한다.
이렇게 본다면 도쿄도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웬만한 나라에 해당하는 거대한 행정구역을 고이케라는 여성이 이끌게 된 것이다.
내게는 고이케 유리코라는 여성에 대한 어떤 추억이 있다. 물론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 여성에 대하여 개인적인 추억은 아니다. 일본에 가서 생활하게 된 1989년에 자주 보던 TV 방송에 ‘월드비즈니스새털라이트’라는 것이 있었다. 선진국이지만 전반적으로 영어 사용이 적은 편인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에 영어타이틀을 붙이고, 게다가 메인 앵커가 여성이었다. 바로 그 여성이 고이케였다. 일본학을 책으로 공부하며 가졌던 편견의 하나가 일본이 선진국임에도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낙후되었다는 것인데, 이 여성은 그런 편견을 깨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고이케는 영어를 잘하는 편이고, 남성들 앞에서 ‘기죽는’ 분위기가 없었다. 당시 고이케의 연령이 30대 후반이었으니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흥미가 생겨 조금 살펴보았더니 고이케는 관서학원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은 명치(明治)기에 미국인 선교사가 만든 대학으로 일본에서는 몇 안되는 기독교계 대학이고, 특히 동경에 대항하는 관서지방에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고이케는 대학을 중퇴하고 만다. 그 이유는 중동에서 사업을 하고자 하는 부친을 따라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 것이었다.
부친을 따라 이집트로 간 고이케는 카이로의 아메리칸대학에 들어간다. 그녀가 영어와 아랍어에 능통하게 된 연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의 꿈은 일본에 와서 아랍어 통역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20대 초반에, 이집트의 권력자 사다트 대통령의 부인이 일본을 방문할 때 수행원으로 일했다는 것은 그녀가 어린 나이에 권력자들 주변에 있는 것에 기죽지 않고 친근하게 되는, 일종의 정치문화수업을 받은 것이다.
귀국 후에 아랍어 통역 일을 하며 당시 중동의 거물인 아라파트 PLO의장, 리비아의 카다피 등을 일본의 매스컴이 인터뷰하는데 코디네이터이자 통역으로 일한 것은 그녀의 정치적 자산을 크게 하였다. 이러한 실적을 바탕으로 고이케는 20대 후반에 일본을 대표하는 TV 토크쇼에 진행자로 참가하여, 30대에 들어서는 국제적인 시사프로그램의 여성캐스터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1990년에 그녀가 ‘일본여성방송자 간담회상’이라는 상을 받는데, 이는 그녀의 방송커리어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녀의 토크쇼를 보게 된 것은 이 전성기 때였던 것이다.
보수정치의 꽃
이러한 실적을 바탕으로 그녀는 정계에 입문한다. 1992년 7월에 있었던 참의원 선거에 고이케는 당시 새로이 결성된 ‘일본신당’의 비례대표로 이름을 올린다. 자민당의 독주에 반기를 들고 나온 호소카와(細川護煕)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중도우파 정당이었다. 당시 이들의 주장은 (자민당의 구식 정치를) “바꾸려면 중고차를 수리하는 것보다 작은 신차를 사는 게 낫다”였다. 미모와 국제성을 갖추고 언론에 얼굴이 알려진 고이케는 이 작은 신차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선거전에서 고이케는 늘 짧은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유세장에서의 관심사는 정치발언이 아니라 고이케가 기자들에게 카메라를 다리의 어느 부분까지 찍게하는 가였다. 당시 한 주간지 연재칼럼의 타이틀은 ‘미니스커트 국회보고’였다. 이는 성적희롱이라기보다, 지루하고 매력 없는 아저씨들이 하는 자민당 정치에 대한 신선한 반란이었다.
고이케는 1999년에 자민당의 오부치 정권에서 경제기획정무차관으로서 내각에 들어간다. 2001년에는 당시 모리 총리와 함께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면담에 참여할 정도로 성장한 정치가 고이케는 2002년에 아예 자민당으로 당적을 바꾸어 버린다. 인생의 성공에 있어, 노력에 못지않게 중요한 결정요인인 운에 있어 고이케는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다. 당시 그 운의 브랜드명은 모리 요시로였다.
한국에서 ‘일본은 신의 나라’라는 발언으로 유명한 우파정치가 모리는 고이케를 귀여워했고, 따라서 고이케는 모리가 이끄는 파벌에서 안착하였다. 이 모리 파벌이 바로 고이즈미에 이어 현재의 아베 신조에 이르는 파벌이다. 고이케는 모리내각에서 환경대신에 이어 오키나와/북방영토담당대신을 거쳐 방위대신을 역임하게 된다. 아랍어 통역을 꿈꾸던 소녀가 자위대를 통솔하는 방위대신을 한다는 것은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환상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도쿄도지사
그녀의 나이 64세가 되던 2016년에 있었던 도쿄도지사 선거에 고이케는 출마한다. 그녀의 대표적인 공약은 ‘동경의 개혁을 위하여 자민당의 지원을 포기하고 무소속으로’ 나선다는 것이다. 그녀의 정치적 자산을 버리는 것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한 스마트한 계산이었다. 케케묵은 자민당 정치에 찌들은 도쿄시민들은 그녀의 선언에 마음이 움직여 2위를 크게 따돌리는 당선을 선사하였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성 도지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4년간 도지사로서 고이케는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가? 이에 관하여 다양한 시각과 평가가 있고 특정한 것을 부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객관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도청 직원들의 내부평가를 보면, 과거의 이시하라 신타로 (작가출신 정치가)의 71점, 마스조에 요이치 (동경대교수 출신)의 63점에 비하여 매우 낮은 46점이었다. 직원들은 그녀를 ‘여제’(女帝)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외에, 고이케가 스스로 ‘카이로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 수십년 전의 발언은 지금도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그런 고이케가 이번의 도지사선거에서 어떻게 압승을 거두었는가? 일본 정치평론가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자민당의 일당독재에 가까운 정치가 지속되는 가운데 야당이 분열, 약화하였고, 그 영향으로 너무 많은 무명의 인사들이 입후보하였다. 이번 선거에는 고이케를 포함하여 무려 22명이 입후보하였다. 투표율은 유권자의 50%였고, 그중에서 고이케가 59.7%를 얻었다. 나머지 21명이 평균 2%씩 가지고 간 것이다.
되는 사람은 더 잘 되는 게 세상사의 이치로, 이번에는 자민당이 도지사 후보를 내지 않았다. 고이케는 여러 당을 옮겨 다닌 경력이 있다. 도지사로 일하면서도 ‘도민퍼스트’라거나 ‘희망의 당’이라는 정치결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녀에 대하여, 같은 모리 파벌에 있던 아베 신조는 큰 의미에서 자기 파벌의 사람으로 보고 자민당에서 후보를 내지 않은 것이다.
역시 고이케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선거를 앞두고 터진 코로나 사태는 도쿄도민의 불안감을 극대화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차분하고 정열된 어휘로 살림을 챙기는 여성도지사의 모습은 위기감에 시달리는 도민들에게 안심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거창하고 의미없는 발언을 계속하는 노인남성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필패하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주효한 것이 오랜 기간 매스컴에 종사했던 고이케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불안에 찬 시민들에게 잘 기획된 모습과 침착한 어조로 대책을 말하며, 특히 (과거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뛰던) 가두연설을 피하고 IT기술을 활용하여 잘 기획된 연설에서 “감염확대를 피하기 위하여 밀집을 피했다”며 화면에서 설득하는 고이케의 전략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감염폭발”이라거나 “(도쿄)록다운” 등의 충격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중간 중간 양념으로 사용한 것이 주효하였다. 이렇게 겁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선장을 바꾸고 싶은 승객은 없는 법이다. 게다가, 고이케에게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돈을 잽싸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예산이라는 실탄이 무기고에 가득 있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도쿄올림픽이다. 2020년에 개최는 실패하였지만, 2021년 여름에마저 실패하여 일본 전체의 패배로 연결되는 것을 바라는 일본인은 없다. 그렇다면 도쿄도의 수장인 고이케와 그녀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모리 전 총리가 대회조직위원장으로서 팀을 구성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팀의 와해를 꺼리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니나 다를까, 자민당의 정조회장을 맡고 있는 기시다는 자민당을 대신하고 나서서 “코로나대책, 도쿄올림픽 준비 등 과제가 산처럼 쌓여있다’고 하며 고이케에 대한 지원을 부탁하였다. 일본사회는 정권의 말을 잘 듣는 아주 예외적인 사회이다.
고이케 도쿄도지사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2024년 6월까지 현직에 있게 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72세가 된다. 노인정치 (gerontocracy)의 정치문화가 정착한 일본에서 72세는 건강만 좋으면 결격사유가 되지 않는다. 고이케가 동경도지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자민당에 복귀하여 총재로 선출되어 자동적으로 일본의 총리가 되는 컨틴전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24년 여름이라면 한국에서는 문재인 정권의 뒤를 이은 정권이 집권 3년차에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한·일간에 가로 놓인 갈등사안들이 완전히 해결되어 있지 않을 리스크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본다. 그런 상태에서 고이케가 일본 총리로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의 한국의 정치문화가 지속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나의 한일관계 기상도 예측은 ‘흐림, 때때로 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