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외교·안보팀, 서둘지 말고 ‘현실’을 보라
2020-07-05 16:19
그 혜안과 안목이 놀랍다. 현대 국제정치이론의 현실주의(political realism)가 쉽고도 평범한 이 아홉 글자 속에 녹아 있다. 이웃국가가 강해지면 이쪽도 강해져야 생존할 수 있으므로 ‘상대적 이익’을 추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국익(國益)의 충돌은 물론 전쟁도 각오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건 이웃국가가 우리보다 강해지지 않는 것이지만 상대 국가가 그걸 받아들일 리 없고 보면 두 나라는 끝없는 경쟁(안보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어윤중이 ‘인국지강 비아국지복’이라고 했을 때 국제질서에 대한 이런 홉스적 인식까지 의식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치적 현실주의의 급소를 짚은 것은 분명하다. 우리 근대에도 이런 선각자가 있었다.
어윤중을 소환한 사람은 김태웅 서울대교수(역사교육과)다. 그는 2018년 <근대재정계획의 설계자, 어윤중과 그의 시대>라는 평전을 냈다. 왜 어윤중일까. 김 교수는 “순수와 열정을 넘어 국제정세와 근대문물에 대한 폭넓은 안목,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 현실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실질적으로 가능한 정책을 수립·집행함으로써 근대에 민족의 생존을 도모한 인물”로서 어윤중을 주목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급진 개화파’인 김옥균 못지않게 ‘온건 개화파’로 혁혁한 업적을 남긴 어윤중도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윤중의 ‘隣國之强 非我國之福’
이 대목에서 떠오른 인물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총리다. 아베는 요즘 부쩍 한국을 견제하려드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G7 가입 가능성을 거론하자, “세계를 리드해 가는 G7은 한국 등이 속한 G20과는 다르다”는 말로 반대의사를 에둘러 비친 것은 한 예다. 존 볼턴 회고록에선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아베는 2018년 북·미 정상회담(싱가포르)을 앞두고 트럼프에게 “김정은을 믿지 않는다”면서 “(북한에 대해) 오바마보다 더 강하게 나서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훼방꾼’으로 보기도 한다. 역시 어디서건 이웃나라의 강함은 내 나라에 복(福)이 아닌 듯하다.
국제정치에선 항용 있는 일이다. 예컨대 일본은 오매불망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고 싶어 한다. 이웃인 한국의 지지가 필요하지만 우리 역대 정부가 앞장서서 거들어준 적은 없다. 과거사에 대한 진솔한 반성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웃국가가 막강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게 솔직히 내키지 않아서다. 일본이 강해지는 게 우리에게 복(福)인지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강해지는 것은 우리에게 복(福)일까. 북한은 ‘외국’이면서 동시에 분단의 일방이자 통일의 일방이라는 특수성이 있어서 가볍게 판단할 일은 아니다. 북이 강해지면 오랜 대남(對南)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남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게 되는 장점도 있을 게다. 그에 따른 소통과 긴장완화, 공동번영, 동질성의 회복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북은 이미 핵을 갖고 있다. 그런 북이 강해지는 것은 분단을 고착화시켜 우리의 안보 부담을 늘릴 수 있다. 북을 돕는 게 우리에게도 좋다는 고전적 논거 중 하나가 “지금 북을 지원해야 북 주민들의 마음도 얻고 통일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 허구성은 깨진 지 오래다. 그런 주장은 남한 주도 하의 관계개선(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북이 수긍하지도 않았다.
남북은 왜 서로 경쟁할까. 한반도의 주도권을 움켜쥐기 위해서다. 장차 통일된 한반도에 누구 이름의 문패를 달 것인가, 그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경쟁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쪽은 세계최강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핵무기 개발에 열심이다. 이게 움직일 수 없는 남북경쟁의 본질이고, 한반도의 현실이고 구조다.
그런데도 몇 차례의 정상회담, 그것도 속셈이 서로 다른 정상들끼리 한두 번 회동했다고 이런 틀이 쉽게 바뀔까. 바뀔 거라고 믿는다면 남북문제를 너무 쉽게 보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내놓는 해법도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이다. “미국이 양보해 북에 제재의 틈을 벌려줘야 하고, 이를 위해 우리 정부도 미국에 더 과감하게 요구해야 한다”는 거다. 그 이면엔 역시 동북아에서의 ‘미국 이익론’과 군산(軍産)복합체론이 도사리고 있다. 수십년도 더 된 메뉴 그대로다.
나 역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사상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했을 때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던 수많은 취재기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때는 모두 그랬다. DJ는 서울에 돌아와 “이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됐나? 북은 계속 무력도발을 했고, 끝내 핵까지 개발했다. 김정일의 서울 답방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DJ는 사석에서 “참 알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고 한다. “회담 자체가 성과였다”고들 하지만 남북관계는 더 기만적으로, 더 세련되게 위태로워졌다.
새 외교·안보팀에 과도한 기대 말기를
새 외교‧안보팀이 그런 경로를 다시 밟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동시에 풀리되 이를 위해선 북이 핵을 버리고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보여줘야 한다. 그런 전제가 충족되지 않는 한 어떤 근본적 변화도 개선도 무망하다. 정상회담의 갈라쇼나, 탁현민 식 이벤트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이런 자세가 우리가 흔들림 없이 딛고 서야 할 ‘한국적 현실주의’의 토대라고 믿는다.
새 팀은 다행히 북한을 잘 아는 사람들로 꾸려졌다.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북의 비핵화와 김정은의 비핵화는 다르다는 것쯤은 아는 면면들이다. 김정은의 비핵화, 곧 ‘선대의 유훈’은 북의 핵무기 포기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우산을 걷어내는 비핵화다. 이걸 진정한 비핵화 의지라고 트럼프에게 전달한 게 화근이었다. 이게 트럼프의 ‘충동구매’와 김정은의 오판을 낳았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역사의 법정에서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서두르지 않았으면 한다. 대통령과 집권 여당, 친여 시민사회단체, 언론, 그리고 열렬 지지층까지도 과도한 기대와 압박을 삼가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문 대통령의 ‘대화 모멘텀 유지’ 방침이 반영된 인사라고 해서 또 한건주의 대화에 매몰될까 걱정이 크다. 새 팀의 전문가들이 더 잘 알겠지만 ‘대화를 안 하는 것도 훌륭한 대화전략’일 때가 있다. 지금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과도기에는 절제(節制)가 최선의 방책이다.
북을 다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박지원 국정원장 내정자가 누구보다 잘 알 터이다. 그런 점에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일성으로 “한반도 평화정착과 함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미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의미 있게 들린다. 한 일간지가 이인영 통일부장관 내정자가 “평화의 오작교를 놓겠다”고 했다는 보도를 찾아보니 제목이 과장됐을 뿐, 실제로는 “노둣돌 하나라도 착실하게 놓겠다는 마음”이라고 돼 있었다. 안도했다. 그런 자세라야 실질적인 진전이 있다. 흔히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새 외교·안보팀이 성공한 역사를 쓰게 되기를 바란다.